[박종칠목사 칼럼] 교권주의자들의 “빨리 해치우자”에 맞선 한상동 목사의 성경적 “신속한” 대처
- 작성자 : HesedMoon
- 16-02-12 11:20
교권주의자들의 “빨리 해치우자”에 맞선 한상동 목사의 성경적 “신속한” 대처: 환원
박종칠 목사(전 고려신학
대학원 교수)
(2016년 1월 18일
밤 11 시에 마침, La Mirada 에서)
한상동 목사님의 생애
중 고신에 대한 그의 제 일차 헌신은 무엇이라 해도 해방 후에 부패한 한국 교회를 향하여 회개를 촉구하므로 기인된 교회 갱신운동으로 태생된 고려파
생성이요, 제 이차 큰 헌신은 고려파 교회가 이 땅에서 말살될 뻔 한 형편에서 “복교선언”을 선언하므로 신학교와 고려파 교회가 환원되므로 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교회에서 고신이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셨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니 환원에
대한 바른 이해가 우리 교회 정체성을 바르게 정립하는 대로 인도될 것이다(내가 자란 교회 뿌리 면에서
그렇지 미주 고신 총회는 독자성을 가지면서 관계성을 유지한다).
미주 La Mirada 에 살면서 근래에 아래 세 사람의 글을 읽었다. 평소
나의 지론과 취미는 원천적 자료들을 읽고는 나의 교회사적 관점을 말하기 좋아하는데 여기서는 여건상 아무래도 제
2의 자료들을 갖고서라도 환원 특히 한상동 목사님에 대한 나의 평소 생각을 말하고 싶다. 그러니
자료적 측면에서 아래 자료들만 갖고 나의 소견을 말하니 아무래도 제한적이지만 우리 (고신)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한마디 하고 싶다. 아래 세 사람의 합동과 환원을 보는 시각은 정도의 차이는 다소 있지만
대동소이 하다. “정서의 지배를 받은”(허순길) 성급한 합동이지만 대체로 세 사람들은 교회 연합이니 나쁠 것은 아니다고 한다. 그러나 환원은 신학적 근거가 없는 성급한 “개인적 결단”(이상규)으로
생긴 교회로 보는 것이다. 심지어 한상동목사님 개인의 조카가 총회 신학교 교수로 채용되지 않은 것에
대한 반응으로 부각시키니-언급될만한 요소는 아닌데 - 우리의
정체성에 대하여 이 정도로 머물고 있나 싶다. 어느 분의 글을 읽노라면 우리 지도자에게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을 가 할 착각이 될 정도다. 그래서 환원에 대하여 우리가 바르게 이해해야만 우리의 미래가 더
밝아지는 것이라고 믿어지는 것이다. 환원에 관계해서 한목사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고신의 역사와 의미가
더 밝아지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한목사님에 대한 자료가 여기 가진 것이 없기에 평소 그의 설교 말씀을
들은 것을 기억해 내면서 관계된 성구들을 찾아 나름대로 쓰는 것인데 특별히 합동과 환원을 세 사람들이 같이 “성급하게” 하였다고 하기에 내가 보기로는 그것은 교권주의자들이 성급하게 교회를 몰아가기에 한목사님은 복음적으로 “신속하게” 전광석처럼
대처한 것으로 본다. 관점의 차이이고 어느 관점이
우리 교회를 바로 세우는데 바르며 그것이 성경적인지 생각할 문제이지 개인 저자를 허물 하는데 초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책상 위에는 우리
교회 교수들과 목사의 책이 있다. 이들의
환원에 대한 부분을 읽었다.
1.
남영환, 한국교회와 교단(서울: 소망사, 1988), pp 472-502
2.
허순길, 한국장로교회사(서울: 고신언론사, 2002), pp. 440-472
3.
이상규, “ 1960년대 승동측과의 합동과 환원”(개혁신학과 교회, 20집, 2007), pp. 77-115
1. 합동과 환원의 년대
1A 합동 과정
1960.
8. : 박형룡 중심한 승동측 목사들이 고신 목사들을 만나자고 제의하여 만나서는 합동
하기로 뜻을 모움(서울)
1960.9.20-23
: 10회 총회(부산 남교회)는 합동추진 위원 9 명
선정(고신 총회)하고는 추진하기 로 결의하고 정회함
1960. 9. : 승동측 총회(승동교회) 4 5 총회 합동위원 9
1960. 10:
10회
1차: 고신 총회(앞의 정회 계속)에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합동을 전제로 하고 추진하기 ”로 결의함. 이때에 송상석은 성급한 추친에 반대하여 사회를 거부하자
부총회장인 박손혁의 사회로 합동 추진안이 가결됐다.
1960. 10. 25-26: 대전 중앙교회 오후 2 시 양화석(9인) 과 황철도(8인) 각 위원회 모여 “감격적인사의 말씀”을 나누고 합동안 결의하고 그 결의안 2의 (4)항은 신학교, (8)은 “합동총회
일자는 1960.12.13 일 하오 6 시 30분으로 한다”
승동측 안 즉 “먼저 합동을 한 후에 노회는 설득과 함께 밀어 부치자 ”는 것에 대해 고신측은 이에 동의해주고 고신측 만은 노회 수의함
1960. 11.
22 오후 3시 30분 : a)고신
총회가 합동 문제를 노회에 수의하기로 함(# 승동측은 먼저 합동을 한 후에 노회에 설득과 함께 밀어
부치자”고 했는데 과연 그렇게라도 했는지?)
b) 합동 취지 및 선언문에 고신 승동 양측의 합동회의에서 합의한 “신학교는
총회 직영의 단일 신학교로 하고”를 “신학교는 총회 직영으로
일원화하고” 수정하였다(송상석 기지) 언제 양측이 단일화를 정했는지?
1960. 12.
13 : 고신 총회는 오후 3 시 30분 흥천교회에서 10회 2차 속회(1 차 속회시에는 합동위원들의 보고를 받음) 모여 노회 수의 결과 받음
1960. 12.
13 오후 6시 30분(이교수는 5시 반이라 하는데 전에 정한대로는 6시 반이다) : 서울 승동교회에서 합동 총회: 취지 및 선언문”에 “신학교는 총회 직영의 신학교로 일원화하고 양보다 질에 중점을
두며, 이사회의 이사 신임 제청제를 폐하지 않기로 한다”이다.
1960. 12. 14.
: 오전
9 시 속개 한상동 총회장
“한국 교우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은 보수신앙이다 .서로 부드러운 마음과 태도로 지내야 할 것이다” “칼빈 주의 신학에
의하여 합동을 원칙으로 하며” 돼 있다.
11B. 합동 후의 혼란
1961. 9.21
: 한상동 총회 총회장 피선(두 번이나), (부산 남교회) 신학교를
호남노회 70인의
소원을 받아드려 연내로 단일화 고려신학교 “점차적인
패쇄” 경남노회 총대들은 일원화하지 않은데 대한 항거로 총퇴장.
1961. 12.
14: 46회 총회 후 그러니 합동후의 : 이사회 결의 : 교장 윤번제, 단일화, 분교, 분교에서는 신입생 모집 않기로 하고 부산 1.2학년은 총회신하교 분교”에서 수업을 하다.
1961. 12.
28(?) : 서울에서 합동 교수회 결의
사항들.
윤번제 는 고신 한상동 등의 영항력 제외키 위한 의도.
1961. 10.
10 : 경남노회 임시 노회 합동총회에
대한 위법성을 결의함
1962. 3. 14
고려신학교 재학생들 항거 (일원회 존속)
1962. 4. 11
제 17회
학우회는 고려신하교 학우회라는 명칭 고수하기로 함
1962. 9. 20
: 47회 총회(서울 승동교회) 이환수 총회
1962.10. 17
복교선언
111C. 환원 과정
1960. 12.13 : 합동 총회(서울 승동교회)
1962. 10.17 : 복교선언(고려신학교
강단에서 한상동 목사님 자신이 사회 및 설교하고 난 후
에 바로 복교 선언함, 예배 후에 한상동 목사님 올라가서
선언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사회. 설교를 마친 후에 복교선언 하였음(필자 거기 있었음)
1962. 10. 22 구 고려신학교 이사회 모이고
10. 23 이들이 주최하는 부산 교역자들 모임
1962. 10. 31: 고려신학교 학우회 5개
항의 복교 지지 선언
1962. 11. 6 한상동 목사 사회로 복교 감사 예베 (신학교에서)
1963. 7. 29 : 환원 발기회(광복동
남교회 이층에서 내가 방청객으로 참석) 환원 취지문
1963. 8. 8 : 환원 지자들(남교회 ) 부산 노회 환원 지지
1963. 9. 17 : 환원 총회
11. 환원의 역사적 의미.
11a. 환원은 교권적 “빨리 해치우자”에 맞선 성경적
“신속한 환원 구원 운동이었습니다.”
고려파 전국 SFC 17회
동기 수양회가(1958) 내가 다녔던 진주 봉래동교회에서(황철도
담임목사, 김종한 전도사님, 후에 부산 거제교회 담임목사). 나는 그 당시 진주 고등학교 3학년으로 우리교회 SFC 총무로 전국 학생들을 열심을 다해 섬기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16회
전국 동기수양회에서(1958. 1월 대구 성산교회) 내 평생
처음으로 참석하여 은혜가 무엇인지 알기 시작하여 모교 진주 봉래동교회에 돌아오자 말자 한상동 목사님 강사로 부흥회에서 십자가를 발견하고 너무나
감격하여 집회 마치고 즉시 강단에서 여전히 기도하고 계시는 목사님 앞에 나아가서 저는 진주 고등학교 3학년생이라고 말하니 나를
그이 앞으로 인도한 교회 SFC 회장이 나를 그에게 소개하기를 진주고등하교 총학생회의 회장인 것도 소개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소개도 귀에 들리지 않고 바로 눈물 어린 마음으로 주님을 향한 나의 헌신을 그에게 다짐했다. 하는 공부도 포기하고 등에 륏사크 메고 삼천리 방방곡곡에 다니면서 전도하겠다고 다짐하니 기도하는 자세로 그대로
있으면서 나에게 그의 특유한 음성과 심지어 존경어를 쓰면서 “하시는 공부는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크게 사용하시려고 그러십니다…” 그리고 나의 담임 목사 황철도 목사님에게 또 여쭈니 같은 말씀을 하면서 “대기만성”이라는 사자어도 알려주었다. 이런 돌발적 체험 전후로 해서 나를 각근히
말씀으로 키워주셨던 분은 김종한 전도사님이였다. 불신 가정에서 처음 믿음으로 많은 핍박이 있었다. 이런 변화를 경험하므로 나의 서울대 아니면 고려대 법대를 가기 위해 고등하교 특별반에서 공부하는 것도 포기하는
인생 항로가 바뀌었다. 이 때에 은혜 받은 것은 “신속한” 결정과 “신속한” 구원전도에
대한 사명이었다. 그 다음 해에 17회 동기 수양회 표제는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였다. 이것은 “내가 속히 오리라”고 하신 천상의 주님이 약속하신 데 대한 교회의 반응이었다(계22: 12, 20). 그 당시 한국 사회는 일제 신도주의 제국주의
올가미에서 벗어나자 말자 불어 닥친 6.25 후의 가난하고 혼란스러웠으니 이단적(극단적 재세례파적) 재림사상이 많이 유통되었다. 이들과는 다르지만 옥중성도들의 메시지도 주님이 “곧” 오실 것을 믿고 우리가 어떤 신앙으로 서 있어야 할 것을 많이 전파하였던 시절이었다. 성경이
가르치고한목사님이 자주 설교에서 인용하셨던 말씀 몇 절들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히 12: 28)
“우리를(us)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 12-13)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벧전 5: 8-10)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벧후 3:
12)
“부지런하여 게으리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 11)
주님 “곧” 오실 것이니 “신속히”, “열심을
다해서”, “부지런히” “성실히”주를 섬기자고 한 말씀들을 나는 김종한 그 당시 전도사님을 통해 자주 들어 은혜 받았는데 후에 한 목사님도 같은 주제로 하시는데 인성이
녹아지는 우주적 차원이 더 강조되었기에 빨려 들어갔다.
,
이런 “ 임박한” 주님 오심을 대망하신 옥중 성도들은 또한 우리 주님의 인종(忍從)하신 선한 목자 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괴로움
당하는 적은 무리들을 찾아 헤 메었습니다. “또
이 우리(sheep
pen)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 10: 16). 신사참배 때의 죄를 회개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이
심판하신 6.25의 참상에서 이리저리 흩어져 고난 당하는 양들을 찾아 한 목사님은 전선이 있는 울산
방어진이며, 쫓김을 당하여 도망 간 양 무리들을 찾아 제주도 등에 찾아가서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암5: 6) 부르짖었습니다.” “임박한” 주님 오심을 확신하면서 잃은 양 찾아 돌아오도록 하는데(회개운동에)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흔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흔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9:12-14). 그러기에 우리 주님은 아버지의 뜻과 계획을 수행하시기 위해 “신속히”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 갔으며, 유대 땅을 넘어 가나안 여인을 찾아갔습니다; 병든자, 문둥이, 귀신들린자, 절음발이, 가난한 자, 눈먼 자, 세리, 죄인들을 찾아갔습니다. 이것이 “메시야
됨의 십볼렛”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자기들 스승
요한의 부탁을 전하니 우리 주님은 자신이 메시야 됨을 요한에게 다음과 같이 알려 주라 하였습니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 7: 22, 참조, 사 35: 5,6; 61: 1)고 하셨다.
1960년도 어느 해의(1968?) 여름방학을
앞두고 고려신학교 경건회에서 일어난 사건을 안다면, 주님의 뜻이면 생명도 불사한 한목사님의 “신속한” 목회 관심이 어떠하다는 것을 짐작할 것이다. 전날에 오 0세 교수가 어느 본문을 읽고는 서양식 휴식을 강조하면서
방학 기간에는 그 동안 공부한다고 수고 많이 하여 진액이 빠지셨으니 충분한 영양을 취하고 여가를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다음 학기를 준비하라고 하면서 서양에는 휴가를 꼭 챙기는 문화를 갖고 있다고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한 목사님은 작심하고 다음 날 경건회를 인도하면서 말씀을 전하였다.
원래는 다른 교수의 설교 순서인데 원장으로서 자기가 대신 전하므로 듣고 보니 어제 교수의 말씀을 반박하는 말씀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한목사님은 요5: 17 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하신다” 말씀으로 우리 주님
쉬지 않고 지금도 일하시니 방학이 되면 “속히” 각각 맡은
교회에 돌아가서 봉사하라고 했다. 방학은 쉬는 것이 아니라 “빨리” 목회 현장으로 돌아가서 그 동안 공부한다고 못 섬긴 봉사를 더 섬기기를 바란다. 약한 자, 아픈 자들, 괴롬
당하는 자들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 방학은 쉬는 기간이 아니고 주님 교회 위해 더 열심히 봉사할
기간이다 는 요지였다. 그의 특유한 청중을 이끄는 설교 배경에는 주님 임재와 오심이 임박한 현실에 주의
종들은 끊임 없는 “신속한” 봉사로 지사충성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이런 두 종류의 마음 가짐이 우리 고신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바라보는 시각이 인간을 중시하여 연속적으로 대처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면서 비록
비연속적이지만 파쇄적으로 하느냐 이다.
이런 “신속한” 메시야적 목회 관심이 합동 시에 승동측의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변질되어 사용되었다. 합동 시에 갑자기 변질된 것이 아니고 고려파 태동시에 “중간파 무리”들로서 그때에 사용해 왔던 것이다(이들의 생태에 대해서는 나의 “고려파의 정신사”와 “환원과 우리의 정체성”을
보라). 고려파와 승동측과의 합동을 통해 저들은 교권확보를 위한 “빨리
해치우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고려파와 합동을 통해 신사참배를
거부한 대한교회의 신앙적 기백의 털을 입고는 명예와 재물을 쟁취하려는 것이었다. 저들이 연동측에 내
쫓기고 보니(1959년 9월 24일 44회 종회) 얼마나
그것이 그리웠든지 스스로 “신속히” 찾아와서(승동측 총회 1960년 9월 22일 이전인 8월에) 과거
자기들 허물을 인정하고 과거 한목사가 옳았다고 하면서 “눈물로 호소”하여
친구로서 과거 정을 생각해서 합하자고 한 것입니다. 이 당시 박형룡 박사 개인의 마음은 진심이었다고
보이지만 훗날 전개를 보면 승동측의 접근은 순수하지 못했다고 생각이 되어진다. 이 접근에 고신의 지도자들은
혹시나 거절하면 교만으로 비춰질까, 아니면 신학도 같고 옛 친구이기도 한 저들을 박절하게 대하면 또
무슨 대한 교회의 빈축과 오해를 받을까 하는 마음이기에 선뜻 합하자고 답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
목사님의 마음 한 구석에는 갈라졌지만(대한 예수교 장로회 초창기의 사건) 연합의 그리움은 있었습니다; “우리의 분리는 분열을 위한 분열이
아니고 …진리의 통합을 위한 임시적인 분열에 불과한 것인 줄 믿고,
50여년간의 오랜 세월 동안 정든 석조누각”을 잊지 못하고 있다(삼일교회 당회록에서)고 한다. 그
마음이 여기 합동 시에 작용한 것이다. 그 결과 승동 측의 신속한 책략은 여지 없이 우리 순수한 자들을
먼저 움직이게 합니다. 고신 노회, 총회 결정을 먼저 하도록
해서 자기들이 뒤에 따라 하는 격순을 취합니다. 자기들이 먼저 합하자고 찾아왔지만 그 순서를 밟음에
고신이 먼저 행동을 취하게 하므로 고신에게 우월감과 책임성이 있게 합니다. 적어도 합동하기 까지는 그랬습니다. 교회사에 합동이라는 대오에 고신 무리들은 순전하게 영광스러운 분위기 비행기를 탄 것입니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교권주의자들은 자기들 교권확보를 위해서는 회의를 자기들 유익에 따라 “신속히” 하기도 “늦추기”도 합니다. 합동 전후의 과정에서는 “신속한” 템포를 보여 줍니다. 우리
교단의 논문 신학 문제 논쟁 시는 템포도 템포이지만 무슨 상하 “위원회” 모임에 바리케이트를 쳐서 교권주의자들이 항의자를 들어오지 못하게 분리시켜 자기들 안을 통과시키는 것입니다. 이것도 교회사에서 자주 일어난 일입니다.
승동 측 교권주의
자들의 목적 달성을 위한 발상 또 하나는 노회 수의를 거치지 않고 교권적 총회로 결정한 것입니다(1960.
10. 25-26 대전중앙교회에서 모인 양측 합동추진 위원회의 결정). 이에 대한 남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합동을 위한 헌법 수정안을 “고신측은
이 문제를 각 노회에 수의하여 노회의 동의를 얻어 하자고 했으나 승동 측은 난색을 표하면서 총회가 먼저 합동을 한 후에 노회는 설득과 함께 밀어
부치자는 것이었다, 고신 측도 이에 동의하여 주고 고신 측 만은 노회의 수의를 거쳐 시행하였다”(필자: 합동 측은 후에 노회 수의나 했느냐?). 교권주의자들의 자기 목적 달성을 위하여 “신속히” 합동하자고 한 것입니다. 그 신속함은 법을 어겨서라도 교권을 위함이지
목장의 양떼들이며 잃어버려진 자들에 대한 “신속함”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양측 지도자들 차원에서 서로 합동을 하자고 양측이 마음을 모운(1960년 8월) 후에는 미리 합동 날짜를 정해 놓고는 (1960년 12월 13일
오후 6시 30분) 서로
뒤질세라 앞 다투어, 그 당시 어려운 교통 수단과 경제적 어려움도 마다하고 소위원회 모임은 물론, 정기노회며 1, 2차 정회, 속회를
하면서까지 “신속히” 하였습니다. 하기야 이러한 신속함은 승동 측과 연동 측이 분열하는 시점에서 연동 측 무리들이 총회 난동을 부린 후에 대전에서
1959년 5월 28일
“밤 열차를 대절하여” 그 익일 날 29일 오전 10 시에 서울 연동교회에서 따로 총회 모인 것에 비하면
그래도 낫다 싶지만 그 “신속함”은 우리 구주 양떼를 찾는
구속운동과는 거리가 멀고, 승동 측은 이들과 한 배에 타고 오면서 교권의 실행들을 많이 터득한 것입니다. 그것을 순진한 고신에 이입시킨 것입니다. 그래도 고신은 합동 총회
건의안을 각 노회에 수의하는 템포는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권주의자들의 “신속한” 행동의 저의를 뒤에서야 알아챈 것은 그 당시 우리 고려파
환원을 하려고 하려는 무리들에게 회자된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결정적 동기를 한상동 목사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려신학교
복교선언이 있기 바로 얼마 전 어느 회의 장소에서 한 목사님이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승동 측 교권주의자들이 “이
참에 빨리 해치우자!”는 말을 엿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합동도 하여 영예로운 교회 명분도 얻었겠다, 그리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교권확보를 하기 위한 숫적
우세도 가졌겠다 이제는 고려파 신학교를 없애는 결정을 하자는 것이 골자인 줄 압니다. 그 외의 내밀한
것도 있었다고 하는데 내가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런 교권주의자들의 신속함에 맞서 한 목사는 성경적 복음적
“신속함”으로 대처한 것이 바로 고려신학교 복교선언을 한
것입니다.
11b. 환원 운동의 “십볼렛”은 고려신학교를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특징은
일반적 교회사적 흐름과 달리 교회의 생성이나 분리를 한 후에 신학교가 생긴 것과는 달리 우리는 신학교가 먼저 생기고(1946, 9, 20, 진해 강좌는 6월) 그 신학과 고백에 따른 자의 교회가 우리 신학교를 옹위하고 회개를 외치니 그 소리가 듣기 싫어 그 당시 한국
교권 총회가 잘라내므로 해서 우리 교회가 총 노회 선포를 한 것입니다(1952. 9. 11). 그 때에도 6.25 전선이 낙동강까지 왔는데도 부산중앙교회에서 고려파 목사 6인을
총회 장소에 못 들어 오도록 해서 “신속히” 제명했던 것이다. 그 6년
기간의 한국 장로교회는 신사참배 반대 투쟁에서 그 정신을 이어받은 고려신학교 말살에 항거한 투쟁으로 변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바른 신학을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1960년도에는 고신과 승동 과의 합동 교회에서 우리가 잘려진 것이 아니고
우리 스스로 본래대로 회귀한 것이다. 초창기 때에는 패역한 교회에서부터 “탈퇴” 하였지만 이번에는 본래대로의 귀의를 의미하는 환원이다. 신학교 환원에 관련한 그 내력을 이야기 하면 이렇습니다.
1.
1960.10.25-26(대전중앙교회): 양측을 대표하는(승동측 10, 고신측 9) 이 결의한 내용은 “신학교 일원화: 신학교는 총회 직영의 단일 신학교로 하고, 동수의 이사를 선출하여 경영케 한다…..”
2.
1960. 12. 13. 오후 3시 30분(서울 흥천교회)에 고신 측 총회
10회 제 2회 속회에서 “ 신학교는 총회 직영의
단일 신학교를 하고”를 “신학교는 총회 직영으로 일원화하고”로
수정하여 최초 합동총회에 내 놓기로 한 것이다(송상석 목사님의 기지에서 나옴)
3.
1960. 12. 13. 오후 6시 30분(서울 승동교회)에 모인 합동 총회는 “신학교는 총회 직영의 신학교로 일원화하고 양보다 질에 중점을 두며, 이사회의
이사 신임 재청제를 폐하지 않기로 한다”
4.
1961. 9. 21 46회 총회(부산 남교회)에서
a.
호남지방
총대 70명 청원을 그대로 받음 “ 총회 신학교의 정상화를
조속히 실현하기 위하여 지경 신학교의 단일화를 연내에 단행하여 전국교회가 혼연 일체되어 정상적인 신학교의 발전과 육성을 위하여 물심양면의 후원과
협조에 총력을 집중케 하되 신학교의 소재를 서울에다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이것은 고려신학교를 잡아
먹으려는 먹잇감이다. 뒤에 가서는 호남 총대들이 저들 지방 신학교를 세웠다)
b.
1961. 10.10 경남노회(46회)가 “신학교를 단일화여 고신을 서울 총회 신학교에
폐합을 결의한 처사의 불법은 경남노회의 고신 존속 건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고의 가치를 인정하지 아니한 희의법이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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