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역사 아카이브] 21. 교회쇄신운동과 여성도들의 헌신
- 작성자 : 나삼진
- 22-04-13 18:26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21. 교회쇄신운동과 여성도들의 헌신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열두 제자들 못지않게 여성도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가 체포될 때 열두 제자들은 다 도망을 갔고, 베드로는 재판 소식이 궁금해 대제사장 집으로 들어갔지만 ‘죽어도 부인하지 않겠다’던 약속(마 26:35)과 달리 세 번이나 예수를 저주하며 맹세하고 부인하였다(마 26:74). 그러나 여성도들은 골고다 십자가를 끝까지 떠나지 않고 무덤 곁에 있었고(마 27:55, 61), 안식 후 첫날에는 그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또 증언하는 영광을 얻었다(마 28:1, 막 16:10).
한상동 목사는 주기철 목사가 가졌던 개인적인 신사참배 반대와는 달리, 조직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교회의 신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경남부인여전도회 총회에 최덕지 전도사 등을 내세워 신사참배 반대하는 이들이 임원에 선출되게 했고, 이후 여성도들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최덕지, 조수옥 전도사가 6년 동안 옥고를 치루었고, 박인순 전도사도 옥고를 치루었다.
주기철, 주남선, 한상동 목사 등이 평양형무소에서 옥중투쟁을 하고 있는 동안, 옥문 밖에는 주기철과 한상동 목사의 부인 오정모, 김차숙 여사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김차숙 여사는 주기철 목사의 집에 오정모 여사와 함께 거주하면서 옥중성도들의 옥바라지를 했고, 이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전국교회와 수난성도들의 연결고리가 되었다. 옥중성도들의 옥중투쟁 소식을 전하며 성도들에게 신앙을 견고히 하게 했고, 철따라 옷을 세탁하여 넣어주기도 하였으며, 전국교회에서 전해지는 사랑의 공궤로 ‘콩밥’으로 대표되었던 열악했던 상황에서 때로 사식을 넣어 영양을 공급하기도 했다. 훗날 신학을 하고 고신교회의 지도자가 된 이경석 목사의 아내 임두연도 같은 동지였다.
이처럼 신사참배 반대운동에서 여성도들의 헌신이 지대했는데, 이는 해방 후 교회쇄신운동에도 연장이 되었다. 출옥성도들의 교회쇄신운동에 목회자들의 협력이 미진했지만, 평신도들, 학생들, 그리고 여성도들이 적극 동참하였고, 진해 신학강좌(1946)에도 13명의 여성도들이 참여했고, 박인순, 명향식, 우태숙, 박복달 등이 초기 고신교회 여성 지도자들로 부흥운동을 이끌었고, 조수옥 권사는 사회봉사를 하였다.
평양에서 태어난 명향식(1910-1979) 전도사는 서울로 내려와 삼각산 기도동굴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하고 깊은 영적인 체험을 하였고, 한국전쟁기에 그의 ‘말씀과 회개, 그리고 신유의 역사가 일어났다’. 1953년부터 무척산기도원을 설립해 원장으로 봉사하면서 전국교회 집회를 인도했는데, 고신교회 성도들이 즐겨 찾았던 기도원으로 고신교회 신앙과 영성 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
조수옥(1914-2002) 권사는 일제강점기에 한상동 목사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할 때 함께 했다. 그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1939년 일제검거 때 체포되어 경남도 경찰부를 거쳐 평양 형무소로 압송되었고, 6년 동안 옥고를 치루었다. 그는 해방 후 인애원을 설립하여 ‘고아들의 어머니’로 평생을 살았는데, 이러한 사랑과 봉사가 사회에서 널리 인정을 받았다. 그는 국민훈장 동백장(1986), 일가상(1997), 여성단체연합회의 용신봉사상(1997), 제1회 유관순상(2002) 등을 수상했다.
대구지방에서는 우태숙(1915-1989) 전도사와 박복달(1917-1993) 권사는 최일출 목사(최일형 목사 형)의 영향을 받아 말씀과 기도의 사람이 되었고, 우태숙 전도사는 초량교회와 삼일교회를 비롯한 300여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였고, 박복달 권사도 많은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귀한 봉사를 하였다. 해방 후 당시 영적으로 혼란한 시기였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이들 중에 교회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 많았은데, 이들은 건전한 성령운동으로 교회를 세워나갔다.
박인순(1915-1999) 전도사는 경남 기장 출신으로 경남성경학교를 졸업한 후 수영교회 전도사로 봉사하던 중에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투옥된 바 있었고, 해방 후 고려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제3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는 제일영도교회와 삼일교회 전도사로 봉사하였고, 전국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였으며, 1971년에 전국여전도회연합회가 조직되었을 때 회장으로 선출되었을 정도로 여성도들 사이에서 존경을 받았다. 박재영 목사는 박인순 전도사가 고향교회 집회에 왔을 때 도전을 받아 목사가 되기로 결정했다.
고신교회에서 이러한 여성도들이 헌신에 대한 전통은 이후 고신교단에 미친 영향도 적지 않다. 고신교회 남성들은 외형적인 활동에 주로 관심을 많이 가졌다면, 여성도들은 기도와 영적인 친교와 선교에 힘을 쏟았다. 1980년대 이후 전국여전도회연합회는 이헌철(인도네시아), 이신철(가나) 두 선교사를 파송, 후원하였고, 1980년대 중반이후 필리핀 김자선, 강정인 두 선교사의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그 외에도 김금순(한명동), 김복연(박손혁) 임옥희(김영진), 조영진(이근삼), 정학분(오병세) 등은 남편을 뒤이어서 고려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교회쇄신운동에서 단순히 목회자의 내조자가 아니라 신앙동지로 역할을 했다. 그들은 신학을 공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이해하고, 교회쇄신운동 정신을 공유했으며, 고신교회 여성도들이 리더십 배양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신교회가 형성기에 이처럼 여성도들의 신앙과 헌신이 밑거름이 되었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고신교회의 여성지도자들’(이상규 편, 고현교회, 2016)에 잘 나타나는데, 명향식, 조수옥, 박인순, 우태숙, 박복달, 임두연, 주경순, 신정순, 김계초, 표지현, 최성순, 오혜순, 차은희 등 의 기록과 자료를 담았다. 고신교회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김차숙, 정양순 여사(손양원)의 기록이 빠진 것은 아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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