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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역사 이야기

[고신역사 아카이브] 24. 흔들리는 박윤선 고려신학교 교장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24. 흔들리는 박윤선 고려신학교 교장

고신교회 초기 역사 가운데 가장 아쉬운 부분은 고려신학교에서 14년 동안 가르쳤던 박윤선 교장이 고신교회를 떠난 일이었다. 이는 고신교회는 물론 박윤선 교수와 한국교회에도 불행한 일이었다. 그는 고려신학교 초기 신학을 결정지은 신학자로, 이상규 교수는 초기 고려신학교의 신학은 ‘박윤선의 신학’이라 하였다. 박윤선 교수(1905-1988)는 평양 장로회 신학교 제29회(1934)로 졸업하고, 일제강점기에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두 차례 유학해 성경신학과 변증학을 공부해 개혁주의 신학에 심취하였고, 만주 봉천신학교에서 가르쳤다.

한상동 목사가 평양 산정현교회를 목회하다 남하한 후 1946년 6월 진해 신학강좌를 거쳐,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내정하고, 박윤선 교수를 교장 서리로 9월 20일 고려신학교를 개교하였다. 1947년 고려신학교가 파송한 송상석 목사의 목숨을 건 안내로 만주 봉천에 머물던 박형룡 박사 가족이 귀국하였지만, 그는 서울에 도착할 때부터 마음이 흔들렸고, 제34회 총회(1948. 4)에서 고려신학교 추천을 금하는 결의가 있은 후 교장직을 사면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후 박윤선 교수는 고려신학교 교장으로서 연구와 강의, ‘파수군’ 기고와 주석 집필, 나아가 많은 교회에서 부흥회를 이끌며 고려신학교의 기초를 놓았다.

출옥성도들의 교회쇄신운동은 6년 동안 계속되면서 제36회 총회(1951. 5)에서 추방되었고, 경남노회 다수는 고려신학교를 지지하였지만, 다른 지방의 경우 서문교회 징계로 서문로교회가, 대구제일교회 21명 징계로 성동교회가 설립되었고, 지방의 많은 교회에서 고신을 지지하는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들을 설립하였다. 그무렵 이러한 교회 상황이 총회에 보고되면서, 또 문창교회 소송이 장기화되면서 총회측에서는 고신교회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고신총노회가 발회(1952) 이후에도 고신교회에서는 소송 문제에 대해 견해가 통일되지 않았다. 한상동 목사는 건덕을 위해 95%의 성도들의 지지를 받으면서도 초량교회를 떠났고, 황철도, 박손혁 목사는 극단적인 투쟁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재산을 포기하는 것의 문제점을 인식하였으며, 송상석 목사는 교회의 재산은 성도의 헌금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보호의 책임이 있다고 보고 적극적으로 응소하였다. 그러나 소송이 장기화되면서 내외적으로 비난을 많이 받았고, 경남(법통)노회는 이 문제를 교리적인 문제로 보지 않고, 두 차례 이상 ‘교회의 형편에 따라 처사하기로’ 결의한 바 있었다.

그런데 고신교회가 개혁운동 10주년을 축하하는 부흥회를 갖고 총회로 개편할 때, 제6회(1956) 총회에서 목사 사면을 하였다가 법적 문제로 철회하였고, 소송 문제, 신학교 문제, 기독교보 문제 등 ‘네 가지 과제’의 시정을 요구했다. 목사 총대 중에 90% 가량이 그의 제자였지만, 이는 총회의 감독을 받는 신학교 교장으로서 그 방법에 무리한 일이었다.

학자들은 박윤선 교장이 고려신학교를 떠난 것을 1960년 9월 주일성수 문제 때문으로 기술하지만, 그가 흔들린 것은 1956년부터였고, 재혼 이후부터 그러한 분위기가 배태되었다. 재혼으로 인한 가정사, 경상도 출신 목회자들과 이북 출신 목회자들의 부조화 혹은 지방색 갈등, 송상석 목사와의 극단적인 법정소송 논쟁이 박윤선 교장이 고신을 떠난 중요한 이유였다.

박윤선이 숭실전문학교를 다니는 동언 고학을 하면서도 아내가 공부하도록 격려해 보성여학교를 졸업시켰을 정도로 깨어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학자로서 연구와 교수와 집필에만 전념해 가정의 경제적인 형편을 알지도 못하였고,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이것이 그의 취약한 부분이었다. 당시는 교회도, 신학교도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때라 김애련 여사는 여러 힘든 일을 해 가며, 남편을 내조하며 자녀들을 돌보았다.

박윤선 교장은 순진한 사람으로 기질상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쉽게 믿는 단순한 성격이라 한상동, 송상석, 남영환 목사 등과도 여러 차례 헤프닝이 있었지만, 김애란 여사는 고려신학교의 적극적인 협력자여서 남편에 대해 ‘떠나려만 당신만 가라’고 했고, 남영환 목사 부인에게는 ‘저 영감 궁둥이에 맷돌을 달아두어야 한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가 네덜란드 자유대학교 유학 중 1954년 3월 아내가 교통사고로 별세하면서 급거 귀국하였다. 어머니를 잃은 청소년기 자녀들을 돌아보지 못하고 이튿날 바로 신학교 강의에 나갈 정도였으며, 홀몸으로 자녀들을 돌볼 형편이 안되자 자녀들을 고아원에 맡길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이에 김차숙 여사가 산정현교회와 초량교회를 거쳐 삼일교회에서 동역하던 이화주 전도사(고신 6회)를 천거해 한상동 목사의 주례로 재혼을 했다.

그러나 재혼 후 바로 기존 다섯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균열이 일어났는데, 구체적인 모습은 그의 딸 박혜란이 쓴 ‘목사의 딸’에서 만날 수 있다. 그와 함께 고려신학교와의 관계에서도 균열이 일어났는데, 이화주 전도사가 재혼 후에 보니 교장에 대한 대우가 자녀교육을 하기에도 충분치 못했고, 새로운 자녀들도 태어나면서 신학교에서 그를 ‘올바로 대접을 하지 않는다고 부추겨 고신을 떠나게 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남영환 증언).

총회이후 박윤선 교장의 제안이 뚜렷한 개선이 없자 1957년 2월에 교장직을 사면하면서 ‘파수군’ 3월호에 ‘우리의 걸어갈 길’과 ‘나의 걸어가는 길’ 두 논설을 발표하고 상경하여 4월에 개혁신학원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협력을 기대했던 경기노회 측의 협조가 여의치 않아 제7회 총회(1957. 9)를 기해 ‘(교회) 쟁탈전과 소송을 하지 않기로 하는 교육이념을 세우고 ... 교육한다’는 요지의 결의서를 한상동 목사, 이사들, 교수 강사 연명으로 결의서를 발표하고, 두 학교의 합병 형식으로 8개월 만에 신학교에 복귀했다.

그는 1959년 12월에 자유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을 위해 출국, 미국에서 완성된 논문을 번역, 보완해 제출하였으나 그 방향에 문제가 있어 박사 학위를 포기하고 1960년 5월에 귀국하였고, 7월에 스푸너 선교사 환송 과정에 주일성수 문제로 9월 고려신학교를 영구히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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