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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역사 이야기

[고신역사 아카이브] 31. '동방박사 세 사람':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교수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31. ‘동방박사 세 사람’: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박사

‘동방박사 세 사람’은 고려신학교 개교와 함께 입학해 5년간 동문수학하고 미국에 유학, 박사 학위를 받고 고려신학교에서 평생 헌신한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교수를 말한다. 총회신학교에 일시 병합되었다가, 1962년 10월 복교 후 이들로 인해 고려신학교가 존립이 가능하였다.

이들은 1946년 9월 이후 예과 2년, 본과 3년 무려 5년 동안 한 교실에서 배웠고, 한국전쟁 후 교수 요원으로 선발되어 미국 유학을 떠나 함께 기도하며 한국교회 미래를 위해 준비했던 ‘고신의 아들들’이었다. 이들은 신학생 시절 한명동 목사와 한부선 선교사를 도와 청소년 수양회(SFC수양회로 계승)를 준비했고, 미국 유학중에도 방학에 함께 수양회를 함께 갖고 한국교회와 고신교회의 미래를 위해 기도했다. 그들은 ‘파수군’을 통해 유학생 소식을 전하기도 하고, 가끔 미국교회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많은 고신교회가 한국교회와 고려신학교의 미래를 위해 준비하던 이들을 위해 기도했다.

홍반식(1918-1993) 교수는 칼빈신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마치고 1962년 유대교 계통의 드랍시대학에서 구약학과 고대근동학을 전공해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길에 이스라엘 성지를 탑사하였다. 그는 합동 후 고려신학교와 총회신학교 부산분교에서 근무하면서 구약을 가르쳤다.

이근삼(1923-2007) 교수는 고든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으며 미국 대학교육 경험을 가졌고, 페이스신학교를 거쳐 카버넌트신학교에서 목회학석사와 신학석사를 받았으며,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변증학을 더 공부했다. 네덜란드 자유대학교에서 한국인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칼빈학원 원장으로 일하다가 고려신학교 복교와 함께 합류해 교의학을 가르쳤다.

오병세(1926-2016) 교수는 커버번트신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콘콜디아신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총신에서 가르쳤고, 고려신학교 복교 후 함께 구약과 신약을 가르쳤다.

‘동방박사 세 사람’은 학자가 많지 않았던 시절에 각각 고유한 색깔대로 고신교회와 한국교회에서 학자의 길을 걸었다. 홍반식 교수는 고고한 인품과 유려한 설교, 유창한 히브리어와 고대 근동어로 학문 탐구와 교수에 전념하면서 교단 정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독실한 재건교회 출신 아내를 두었기 때문에 부부생활에서 소소한 가정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였지만 삶의 모든 에너지를 학문에 쏟아 한국 구약학계에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이근삼 교수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특별한 은사로 독일 유트 목사를 통해 쇠고기를 공급받아 신학생들의 영양을 공급하였고, 네덜란드 캄펀신학교, 미국 리폼드신학교, 남아공 포쳅스트룸대학교 등과 교류의 길을 터 수많은 교수 인력을 양성했다. 나도 그의 도움으로 유학을 하였다. 그는 고려신학교-고려신학대학-고신대학-고신대학교로 발전하는 한 가운데 서 있었다. 그는 미문화원 사건 때 대학의 문부식, 김은숙, 의예과 학생들이 연루되어 학장직을 사면하였고, 몇 년 후 학장을 맡았다가 대학이 고신대학교로 승격하면서 초대 총장이 되었다. 그는 은퇴 후에 미국에서 에반겔리아대학교를 설립해 12년 동안 육성하고 캠퍼스까지 조성하였다.

오병세 교수는 1964년 청년학자로서 교육과정심의위원장을 맡아 양승달, 허순길, 윤종하, 이만열 등 젊은 청년들을 독려, ‘생명의 양식’ 교육과정을 완성했고, 교단적으로 교단 역사 편찬, 헌법 개정 작업, 한국교회 성경개정 작업과 한국개혁주의신행협회 육성,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조직으로 한국교회 신학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세 교수 중 유일하게 총회장을 지냈다.

고려신학교는 복교 후 박손혁 이후 세 사람이 번갈아 교수회장을 맡았고, 이북 출신 교회와 지도자들이 많이 이탈해 고신교회 지도력이 약화되었을 때, 대학과 신학교육은 물론 교회들을 방문해 강의와 설교와 집회로 교회를 세웠다.

필자는 신학대학원을 졸업하면서 총회교육원에서 사역하면서 ‘동방박사 세 사람’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며, 교실밖에서도 그들을 배울 수 있었다. 1970년대 고신교단 분쟁으로 교단교육이 오래 정체되었을 때, 전국노회의 열화와 같은 요청으로 제32회(1982) 총회에서 총회교육위원회가 설치되면서, ‘교단적으로 신학을 책임질 수 있는 인물이 위원장을 맡아야 한다’는 명분에 홍반식 박사가 위원장에 선임되었고, 이후 오병세, 이근삼, 김병원 박사까지 2005년까지 16년간 계속되었다. 이러한 제도는 당시 총회교육위원회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필자가 총회교육원 간사로 선임(1985)된 후 매월 한 차례 식사를 겸해 2-3시간을 실행위원회의로 모였다. 제자들 중에 교실 밖에서 ‘동방박사 세 사람’을 가장 자주, 또 정기적으로, 깊이 만나지 않았을까 싶다. 스승들과 함께 일한 것을 감사해 각각 몇 권의 책을 엮어 드렸다.

홍반식 교수가 은퇴할 때 은퇴 기념문집이 출판되지 못해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1989), ‘구약성경과 신학’(1990) 두 책을 엮었고, 그의 책 ‘성경의 핵심교훈’을 나누어 ‘구약성경의 핵심교훈’과 ‘신약성경의 핵심교훈’(1989)으로 성경통신대학 교재로 출판했다. 1993년 그가 소천할 때 같은 지역에서 유학중이었던 나는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였다.

이근삼 교수는 ‘기독교 기본교리’(1990)와 ‘개혁주의 신앙과 문화’(1991)를 엮어드렸고, 그가 소천한 후 책임편집자로서 ‘한국의 개혁주의자 이근삼 전집’(전 10권, 2008)을 편찬하였다. 오병세 교수는 ‘신약개설’(1986), ‘사해문서 연구’(1989), ‘교회 교육 신학’(1989)을 엮었고, ‘신약개설’은 ‘성경의 맥을 잡아라’(1998)로 다시 태어났다.

‘동방박사 세 사람’은 오랜 세월 함께 협력했지만, 때로 긴장하고 때로 경쟁도 하면서 고신교회의 고등교육과 신학교육을 책임졌다. 그들은 다미선교회의 종말론 열풍이 미국까지 불었을 때 재미고려신학대학원(학장 박재영)의 주선으로 1991년 1월에 로스엔젤레스, 뉴욕 등 네 지역에서, 7월에는 다시 시애틀, 시카고, 토론토 등 다섯 지역 11교회에서 개혁주의 종말론 강좌로 교회를 일깨웠고, 평생 동역과 경쟁과 갈등 가운데 평생 묻은 때를 깨끗이 닦아내었다. 이는 홍반식 교수의 소천 불과 1년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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