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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교사 열전] 19- Malcolm Fenwick (말콤 펜윅) 선교사 편


Malcolm C. Fenwick (말콤 펜윅) 선교사- 1889년 입국

펜윅 선교사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말콤 펜윅 선교사는 1889년, 약관 26세의 나이로 조선(한국)에 와서 조선(한국) 침례교회를 세운 초대 선교사이다.

그가 전성기에 개척한 교회는 250개 였고, 두만강과 시베리아까지 가서 교회를 세우는 열정을 보였다. 그 외에도 성경의

독자적번역, 찬송가 간행 등 문서선교에 기여한 공이 큰 선교사이다.


펜윅 선교사는 1863년 캐나다 토론토 시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열 한 자녀를 낳은 후 펜윅이 다섯살 때 죽었다. 그는

신앙이 독실한 어머니와 여러 해 동안 그의 집에 같이 살았던 한 목사님의 영향으로 어린시절부터 교회에 다녔다. “말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대개가 안식일을 기억하지 못하면서 타락하기 시작한다.” 목사님의 가르침으로 인해

그는 죄에 빠지지 않고 주일학교에서 여러가지 직분으로 봉사하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가 큰 사고를 당하게 되었는데 이때 펜윅 선교사에게 말했다. “아들아, 네가 예수님께 마음을 드린다면 너를

아무리 멀리 보내도 상관하지 않는다” 이 일로 그는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 찾고자 결심했다. 그 뒤 그는 2년 동안 산에

올라가 밤새워 예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롭게 살고자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온갖

노력에도 의로와지기는 커녕 시커먼 죄인임을 발견하고 좌절에 빠졌다. “주님, 저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입니다.” 

그는절망 중에 토론토 시내 어느 거리를 방황하다가 주님의 인자한 음성을 들었다. “너는 자격이 없지만 내게는 있노라.

는 너를 살리려고 죽었노라” 이 사건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

26세 되던 1889년 어느 날 조선(한국)으로 가라는 부르심을받았다. 그는 당시 의료 선교사로 조선(한국)에 왔던 헤론

선교사의 아내가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조선(한국)에서 감옥에 수감되었고, 조만간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캐나다 신문은 연일 그 소식을 다뤘다. 그 때 그 일을 들은 고향 집의 연로한 목사님이 슬픔 중에 회중 앞에서

기도를 드리면서 말했다. “주여, 주께서는 조선(한국)이 태평양한 가운데 있는 섬인 줄을 잘 아시나이다” 이 정도로 당시

지식인들도 한국이라는 나라가 지도 어디에 붙어 있는지 몰랐다. 그도 한국이 지중해에 있는 어떤 섬인 줄로 알았다. 그는

선교사가 가는 곳은 으례 무더운 지역인 줄로 알았다. 그러므로 한국에 연중 석달 동안 눈이 120센티나 쌓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도대체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명확한 상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는 보다 앞서 조선(한국)에 간 맥켄지

선교사와 아는 사이였다. 그는 맥켄지 선교사에게 신학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편지를 썼다. 또 외국어를

공부해 본 적이 없고 한 언어라도 제대로 말할지 자신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멕켄지 선교사는 말했다. “가서 예수를

위해 죽을 마음이 없습니까? 그들이 배척하더라도 복음을 전하고 순교하면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 앞에 떳떳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선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이후 나이아가라 사경회에서 다년간 성경공부를 했다. 그당시 그는 철물 도매업을 했으며 직원 40명을 거느린 창고

책임자였다. 그는 저녁 시간을 이용해 성경을 공부하고 기회가닿으면 복음을 전했다. 그러다가 나이아가라 사경회를 하는

중에 다시 한번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또 변명했다. “저는 사업가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목사도 아니고 신학교에 가본 적도 없습니다.” 주님은 "다시 “가라"고 명했다.

그날 저녁 인도에서 온 윌더라는 형제로부터 사막에서 애타게물을 찾으며 죽어가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사막에서 물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화려한 유리 주전자에 물을 담아 화려한 유리잔에 따라 주면 감사하게 마실 것이다.

그러나 더럽고 쭈그러진 양철통에 물을 담아 주더라도 역시 감사하게 받아 먹고 생명을 보존할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물이다” 이 말을 듣고 변명하는 마음을 버렸다. 적어도 찌그러지고 누추한 양철통은 되어 생명수를 전달할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즉시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넉달의 항해 끝에 조선에 도착했다.



처음 열 달은 한국어를 배우려고 각종 교과서들과 지침서를 탐독했다. 그러나 암기하는 방식으로 실패한 후 조선(한국)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기로 결심했다. 그는 몇몇 조선(한국) 친구들과 함께 황해도 소래로 떠났다. 당시 조선(한국)에는

사냥하는 사람들이 없었으므로 사냥꾼들의 낙원이었다. 다섯 종류의 오리떼들이 4-5km의 강을 빽빽이 뒤덮었고,

기러기들이 물댄 논에서 날아오를 때는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하늘이 까맣게 덮일 정도였다. 산에 들어가면 멧돼지, 흑곰,

표범과 호랑이 같은 큰 사냥감들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소래 마을에서 소년반을 하나 만들고 마을 여성 중

유일하게 글을 깨우친 안 선생 부인이 부인들과 소녀들을 가르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성경을 가르칠 때 한국어로 찬송을

부르고 싶고 가르치고 싶었다. 짧은 어휘로 고생을 했는데 특히 문제된 문장은 “너희에게 생명을 바치신다” 였다.

한국어에는 하인이 상전에게, 백성이 임금에게 어떤 것을 바칠 때를 제외하고는 바치는 것에 해당되는 단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번역을 본 조선(한국) 친구들이 가당치 않은 일이라고 반발했다.

“위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비천한 하인의 자리로 끌어내리고 우리 같은 진토의 벌레들을 높은 자리로 끌어 올리다니

이건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하인이나 백성이 자기 임금에게 무엇을 바칠 때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바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인의 자리를 취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비록 그리스도인이라 고백은 했지만

관습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펜윅 선교사는 일어나서 말했다. “선비 여러분, 빌립보서 2장 5절을 보십시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종의 형상을 입으셨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여러분의 하인들이 여러분에게 하듯 그 분은

두 손을 뻗어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을 값없는 선물로 ‘바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선물을 걷어 찰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말했듯이 진토의 벌레들과 같은 우리들 앞에서 영광의 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그리고 다음과 같은 찬송으로 다시 한 번 선언합니다. 생명을 여러분에게 바치시네,

아멘.” 이 말을 들은 한 젊은이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걸어나갔다. 문을 열고 돌아선 그의 얼굴에는 두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펜윅 선교사는 1893년 잠시 귀국해 미국과 캐나다에서 신학교육과 훈련을 받고 침례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듬해 다시

내한해 보니 신자가 300명 가량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소래에서 원산으로 선교지를 옮기고자 했다. 그가

캐나다에 간 사이 소래에 프로테스탄트 선교부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소래 사람들은 남아서 자기들의 목사가 되어

달라고 간청했다. 급료를 지불하고 더 큰 집을 지어 주고 하인들을 붙여주고 전도를 돕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소래에

미련을 버리고 교회가 없는 새로운 선교지를 찾아 원산으로 갔다. 펜윅 선교사는 자서전에서 조선(한국)인들을 이렇게

평가했다. “조선(한국)인들의 생김새는 중국 사람들과 다르고, 일본 사람들과는 딴판이다. 일본 사람들보다 키가 훤칠하고

몸집도 크고, 지적으로 더 우수하며, 일본 사람들에게 가득한 잔인한 말레이족의 피가 조금도 흐르지 않는다. 조선(한국)

사람들은 명민하여 어떤 가르침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지적 능력과 창의력이 있고, 근면하고, 고생과 시련을 초인적으로

잘 참아 내며, 적자가 생존하는 야생 동물들과 비슷한 활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백인에게 아주 예의바른 태도를 보

이고 심지어 웃음을 띠고 목례를 할지라도 속으로는 메스꺼워하고 경멸하고 싫어한다. 속으로는 ‘백인은 무례하고

거만하다. 비누냄새를 풍긴다고 생각한다.” 펜윅 선교사는 이렇게 백인을 야만인으로 경멸하는 그들에게 몇 달이고

주일마다 찾아다니면서 설득했고, 눈물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했다. 또한 예수님이 그 보혈로

자신의 죄를 씻으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무거운 죄짐을 벗고 마음에 얻은 평안을 증거했다. 그는 출입이 허용된 지역들을

철저히 전도했다. 먼저 성경반을 열고, 성경과 쪽복음을 비치하고 경험있는 사람에게 공부 반을 맡기며 그를 그 지역

지도자로 삼았다. 그 지도자에게 10-20명의 전도자들이 배속되었다. 전도자는 한 달 동안 팔 수 있는 분량을 짊어지고

자기가 맡은 군으로 가 읍과 촌락들을 방문했다. 빠지는 집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되도록 모든 사람을 만나며, 만나는

사람에게 간절히 때로는 눈물로 호소하며 복음을 전했다. 한 권에 0.5센트나 1센트하는 복음서를 그들이 사지 않으려고

할 때는 요한복음 3장이 적힌 전단이나 성경본문을 적절한 주제에 따라 배열해 놓은 전단을 건네준다. 관할 구역을 다 돌아

보기 위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이 일을 되풀이한다. 이렇게 해서 펜윅 선교사는 31교회를 세웠다. 교회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십인 순장, 오십인 순장, 백인 순장(총장)들을 두었다. 이들이 맡은 일은 집사들을 보조하는 것이다. 집사들은

그들을 감독하고 교회 재정을 관리하며 신앙감독도 하였다. 집사들 위에는 조사들이 있었는데 조사들은 목사들의 감독하에

담당교회들을 돌보았다. 목사들 위에는 감목, 또는 치리 목사가 있었고 목사들은 석 달에 한 번 담당 지역들에서 성경공부

및 행정적인 일을 위해 모임을 가졌다.


펜윅 선교사는 조선(한국)에서 25년간 선교사의 삶을 살았다. 때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외로움에 시달렸다. 1899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어머니께로 갔다. 그러나 병이 회복된 후 또 작별하게 되었다. 이때 어머니는 담대히

말했다. “아들아, 괜찮다. 예수님이 곧 다시 오실 게고, 그날이 오면 서로 다시 만나 영원히 더 이상 작별하지 않게 될 거다.”

정거장에서 어머니를 뒤로 한 채 조선(한국)으로 오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북받쳐 올랐다. 그는 조선(한국)에 돌아온지 얼마

후 한 아편 중독자를 회심시켰다. 그러자 동네사람들은 귀신들이 그를 좇아 다니며 식구들을 죽일 것이라고 위협했다. 얼마

후 그들의 말대로 할머니가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큰 굿을 벌여 귀신들을 달래라고 재촉했지만 그는 거절하고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뤘다. 그런데 얼마 후에는 그의 어린 자녀들 중 둘이 악성 열병에 걸려 갑자기 죽게 되었다.

동네사람들은 다시 귀신 달래는 장례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나는 예수식으로 장례를 치를 거요.

아이들이 죽기 전에 예수에 관해 들은 것을 참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는 열달만에 교인 수 평균 45명이 되는 열 개의 교회를

세웠다. 이런 역사에 힘입어 펜윅 선교사가 세운 교단은 1년 6개월 동안 교회수가 162개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처럼

조선인들과 수많은 선교사들의 고결한 희생으로 말미암아 조선(한국) 땅에 복음이 심기워지게 된 것이다.


펜윅 선교사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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