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교사 열전] 4 - Cyrus H. McCormick (사이러스 맥코믹) 장로 편
- 작성자 : Henry Park
- 19-07-07 12:53
맥코믹 장로는 미국의 위대한 발명가로, 사업가로, 그리고 자선사업가로 1809년 버지니아 주(Virginia) 쉐난도 밸리
(Shennandoah Valley)에서 태어났다. 그는 탈곡기를 발명하여 미국의 농생산물의 급격한 수확을 도모하여 미국
농가뿐 아니 라 미국의 경제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맥코믹 장로는 평생 경건한 장로교 신자로 살았다. 또한 신 구학파(New & Old School)로 분열된 미국 장로교의
통합에도 나름의 노력을 쏟았다. 그는 칼빈주의자로서의 자기부인적 삶, 절주, 절제, 경건 한 삶을 살았고 당시
신학파(New School)가 우세한 미 중부지역에서 구학파(보수파, Old School))의 교회 개척, 신학생과 목사의 재정적
지원에 관심이 많았었는데 이를 결정적으로 보여준게 바로 장로교 북서신학교 (후의 맥코믹 신학교)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of the Northwest(McCormick Seminary) 재정적 지원이다. (이 신학교는 1830년에 인디애나
(Indiana) 주 하노버 (Hanover) 소재 하노버 대학(Hanove College)의 신학과로 1830년에 처음 설립되었고, 인디애나
신학교로 불렸다. 인디애나 주 뉴올버니(New Albany) 로 이동한 1840년에는 뉴올버니 신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후 재 조직되어 시카고에 이동한 1859년에는 북서 장로회 신학교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of the
Northwest) 라는 교명을 유지하다가, 1886년에 마침내 맥코믹 장로회신학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장로교 북서신학교가 1857년에 재정위기로 문을 닫자, 2년 후 수확기계 발명자이자 부유하고 보수적인 장로교인인
사이러스 맥코믹(Cyrus H. McCormick) 장로가 구학파 교수직 네 자리 를 만드는 조건으로 재정을 지원하여 다시
학교를 열게 했다. 이때 사이러스 맥코믹이 구학파 신학의 중심지로서 그 신학 (구학파신학)이 올바르게 교수된다는
보장하에 맥코믹신학교에다 기금을 기부하게된 것이다.
맥코믹신학교가 더 분명한 구학파(보수파) 성향을 띠게 된 때는 1886년으로, 프린스톤 신학교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의 조직신학 교수였던 B.B Warfield (워필드)박사를 신학교 학장으로 영입하려 수차례 수고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차선책으로 당시 미 중부지역에서 명망있던 Willis Craig (크레이그) 박사를 학장으로 영입하여
구학파적 색깔로 자신의 신학과 신앙을 분명히 하였다. 맥코믹 장로는 자신의 제안으로 인디아나 주에 있던 장로교
북서신학교를 시카고로 옮겨오고 약속한 헌금을 드려 1859년 시카고 링컨파크(Chicago Lincoln Park)에 부지를
마련하고 신학교를 지었다. 이 신학교는 맥코믹 장로에게 감사를 표하며 맥코믹 장로 사후에 그를 기리어 신학교
이름을 1886년 맥코믹 신학교로 개명한다. (맥코믹 신학교는 1975년 시카고 하이드팍 (Chicago Hyde Park)으로
옮겨 현재는 시카고 루터란 신학교와 같은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869년에는 무디(Moody)가 창설한
YMCA에 $10,000 달러를기부하고 무디 신학교(Moody Bible Institute)의 전신인 Chicago Evangelization Society에
당시의 거금인 십만 달러를 헌금하고 맥코믹 장로의 아들 사이러스 주니어는 무디 바이블 신학교의 초대 이사장이
되는 영광을 누린다.
1858년 맥코믹 장로는 고아이었으며 당시 비서로 일하던 낸시 “네티 “파울러(Nancy "Netty" Fowler)와 결혼하여 7
자녀를 두는데 맥코믹 여사는 시카고로 오기전 뉴욕 주(New York)에 있던 트로이 여자신학교 (Troy Women's Bible
College)를 졸업했다. 수많은 실패와 특히 시카고 대화재(The Great Fire of Chicago)로 인하여 맥코믹 장로의 공장이
완전이 소실되었으나 끝까지 격려하고 재기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장부 맥코믹 여사가 있었고, 맥코믹 장로가
성공한 이후 많은 재산을 헌금내지 기부한 배경에는 맥코믹 여사가 있다. 맥코믹 장로 말년에 뇌졸증으로 인하여
사업을 잘 돌볼 수 없었을 때에 맥코믹 여사는 사업가로서 수완을 발휘하고, 맥코믹 장로가 세상을 하직한 후에도
맥코믹 여사는 막대한 부를 고아원과 학교, 도서관 그리고 교회를 짓는데 아낌없이 지원한다. 마포삼열 선교사의
집에서 시작한 평양신학교를 1907년 미국 시카고의 맥코믹 여사(Mrs. Nancy “Nettie” Fowler McCormick)가 보낸 5천
달러의 지원금으로 평양 하수구리 100번지에 있는 6,000 여평의 대지에 1908년 5월 15일 새로운 신학교 교사를
신축 하는 착공식을 갖고, 이듬해인 1909년 준공되어 당시 138명 의 신학생이 새 교사로 이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신학교 자매학교였던 정신여학교 교사 신축에도 기부했다.『계속』
박흥배 목사
안디옥 세계선교협의회 회장
왈브릿지 열방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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