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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2000년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주요 사건 열전 - 제1차 니케아 공의회 AD325 ①


제 1차 니케아 공의회 


아리우스 논쟁과 니케아 공의회


1) 논쟁의 발단
아리우스 논쟁의 기원은 콘스탄틴 황제가 등장하기 오래 전부터 계속되고 있던 신학적 발전에서 찾아야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논쟁은 저스틴, 알렉산드리아 클레멘트, 오리겐 등 여러 학자들의 사역으로 인하여 기독교 신자들이

하나님의 본질을 생각하게 되었던 형태와 직접적 결과였다.

하나님에 관한 성경의 기록과, 불변이요 고정적인 지존의 존재라는 고전적 개념을 조화 시키기 위해 두 가지 방법들

사용되었다,

이 둘은 곧 성경 귀절들을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것(allegorical interpretation)과 로고스(Logos)의 교리였다. 이 중

풍유적 해석은 매우 쉽게 적용할 수 있었다. 성경이 하나님에 관해 무언가 "가치 없는 방법으로" 표현할 때마다  즉,

지존의 존재가 가진 완전성에 걸맞지 않은 표현이 나타날 때마다  이러한 표현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 돌이지 않는

것이다.

또한 로고스의 교리는 저스틴, 클레멘트, 오리겐 등에 의해 발전되었고 이들의 이론에 따르면, 비록 지존의 존재

성부가 불변이요, 고정적인 것은 틀림없으나, 동시에 세상 및 인간들과의 직접적 관계를 가능케 하는 인격적 존재, 즉

로고스(Logos), 말씀(word) 혹은 하나님의 이성(Reason 0f God)이 있다는 것이다. 오리겐 및 그의 제자들의 영향으로

인하여 이러한 이론들은 특히 라틴어가 아니라 헬라어를 사용하는 교희의 동부에 보다 널리 퍼져 있었다. 당시에

일반적으로 받아 들여진 관념은 불변의 존재와 변화하는 세계 사이에는 말씀, 흑은 하나님의 로고스가 위치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 속에서 아리우스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 논쟁은 리키니우스가 아직 동부를, 그리고 콘스탄틴이 서부를 다스리고 있을 때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교회 감독이던 알렉산더(Alexander)는 여러 가지 문제로 이 도시에서 가장 뛰어나고 인기 있는

장로돌 가운데 하나였던 아리우스(Arius)와 충돌하게 되었다. 양자는 여러가지 문제로 논란을 벌였으나 가장 중요한

논쟁의 초점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The Word 0f God)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하느냐는 것이었다. 그 후 아리우스파의

모토가 되었던 "그가 존재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There was when He was not)"는 귀절은 이러한 문제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는 말씀께서 성부(The Father)와 함께 영원히 존재한다고 주장하였고, 반면에 아리우스는 말씀이

성부와 함께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언듯 보기에 이는 별로 큰 차이가 아닌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

말씀의 신성(The divinity of the word)이 여기에 달려 있었다. 엄밀하게 말해 아리우스는 말씀은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으뜸되는 존재라 주장하였다. 그런데 아리우스도 말씀의 성육신 이전의 존재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말씀의 선재(The preexistence)에 관하여는 양자 모두 동의하고 있었다. 아리우스의 이론인즉 이 세상 그

어느 피조물도 창조되기 이전 말씀이 하나님에 의해 먼저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말씀은 신성을

지니고 계시므로 창조될 수 없고, 성부와 함께 영원한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이 양 당파는 모두 성경으로부터 뽑아낸 증빙 구절들과 아울러 상대방의 위치를 붕괴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였던

논리적 이유들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우스는 우선 알렉산더가 기독교적 유일신론을 부인한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리아 교회 감독의 주장에 의하면 신성을 지닌 존재가 둘 있게 되므로 결국 두 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알렉산더는 이에 답변하기를 아리우스의 이론은 말씀의 신성을 부인함으로, 이에 따라 예수님의 신성이 부인

된다고 하였다.

알렉산더는 결국 감독의 권위와 책임에 근거하여 아리우스의 교훈을 정죄하고, 그롤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모든

직분에서 축출함으로서 논쟁은 공개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아리우스는 이러한 처분에 승복하지 않고 알렉산드리아 시민들과 안디옥에서 그와 함께 수학하였던 동방 제국의

중요한 감독들에게 호소하였다. 곧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아리우스의 신학적 요절들을 외치며 행진하는 일반인들의

시위를 볼 수 있었다. 또한 아리우스의 호소를 받은 감독들은 아리우스의 입장을 옹호하여 알렉산더의 이론이

오류라는 서신들을 띄우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알렉산드리아의 지방 신학 논쟁이 전체 동방 교회를 분열시킬 위협을

가져왔다. 이것이 바로 리키니우스를 패배시킨 직후 콘스탄틴 황제가 중재에 나섰을 때의 상황이었다. 그는 우선

종교 문제에 관한 그의 고문이었던 코르도바 교회 감독 호시우스(Hosius)를 파견하여 양파의 화해를 꾀하였다. 양자

간의 갈등은 결코 중재로 해결될 수 없다고 호시우스가 보고하자, 콘스탄틴은 제국 전역으로부터 기독교 교희의

감독돌을 소집하여 대 종교회의를 열게 되었다 당시 선명하게 기준이 되는 정책들을 필요로 하였던 몇 가지 문제들과

아울러 이 대 회의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된 논쟁을 해결해야만 했다


2) 니케아 공의회

후세인돌에 의해 최초의 에큐메니칼(Ecumenical), 즉 세계 종교회의라고 알려지게 된 모임을 위해

콘스탄티노플에서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소 아시아의 니케아(Nicea)에 감독들이 모인 것은 서기 325년이었다. 정확한

참석 인원은 알 수 없으나 니케아 신경을 투표,찬성 서명한 감독 316명, 반대한 감독들 2명을 보아 318명 정도로 추정

된다. 이들은 대부분 헬라어롤 사용하는 동방에서 왔으나 서방 교희의 대표돌도 있었다. 당시 기독교 신자들이 이

회의를 대하는 감상은 각별한 데가 있었다. 이 대 희의에 참석한 일부 교희 지도자들은 최근까지도 투옥 당하고, 고문

당하고, 귀양을 갔던 인물 들이었으며, 어떤 이들은 자기들 신앙에 대한 간증으로서 육체적 상처롤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시련 후 채 몇 년도 지나지 않아 바로 그 감독들이 황제의 융숭한 대접 속에 니케아에 초대되었던

것이다. 이제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이들은 교회의 보편성을 증거하는 사건에 직접 참여하게 된 것이다.

감독들은 박해 후에 시급히 처리해야 했던 많은 안건들을 의논하였다. 이들은 변절자들을 다시 교회 안에 받아

들이는 절차와, 장로들과 감독들의 선출 및 안수, 그리고 여러 지역돌의 우선 순위에 관한 기준을 마련하였다. 물론 이

희의가 직면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아리우스 논쟁이었다. 이 안건에 관하여는 서로의 입장이 달랐다.

우선 확신에 찬 소수의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니코메디아 감독 유세비우스에 의해 통솔되고 있었다.

아리우스는 감독이 아니었으므로 회의에 직접 참석할 수 없었으며, 이 때문에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그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이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소수의 집단은 물론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에 의해 이끌어지고 있었다. 이들은 아리우스

주의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분명히 그 가르침을 정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확신하였다.

알렉산더의 추종자들 가운데는, 당시 집사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희의에 참석할 수 없었으나 그 후 니케아 신경의

정통 수호자로서 그 이름을 떨치게 되는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of Alexandria)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라틴어 사용권인 서방 교회들을 대표하는 감독들의 대부분은 이 논쟁에 관해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들은 당시의 논쟁이 단지 오리겐의 추종자인 동방 교회들의 출신들 사이에 발생한 국부적 논쟁으로만

생각하였다. 이들은 이미 오래 전 터툴리안이 선포한 바대로 하나님은 "한 본질에 세 위격(three persons and one

substance)"이시라고 정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보았다. 이들은 드디어 박해가 겨우 종식되고 새로운 기희들과

수많은 문제들이 출현하는 가운데 이처럼 교희를 분열시킬 가능성이 있는 논쟁이 발생했다는 자체룰 걱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희의 초기에 이들 감독들온 우선 다른 문제돌을 해결하기 위해 단지 모든 이들이 동의할 수 있는

타협책을 찾기에 부심했던 듯하다. 이러한 태도롤 견제한 대표적 인물은 동료 감독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던

학식있는 역사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였다.

그러나 회의가 진행되면서 처음에는 어느 편의 교리도 정죄함이 없이 화해와 타협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이들은 이제 가능한 한 가장 명확한 표현으로 아리우스주의를 정죄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아리우스

주의를 명확하게 배제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교희의 신앙을 표현할 신경을 작성한다는데에 합의하였다. 콘스탄틴은 그

신경 가운데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즉 동일 본질이라는 단어룰 삽입하도록 종용하였다.

마침내 희의는 아리우스주의를 명백하게 배격하는 신경(Creed)에 합의하였다. 이 신경온 그 후에 첨가된 부분들과

함께, 그리고 마지막 귀절의 저주 부문을 삭제한 형태로서 가장 널리 받아 들여지고 있는 기독교 신경인 "니케아 신경

(Nicene Creed)"의 모체롤 이룬다.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하였던 감독들은 그들이 합의한 신경에 의해 아리우스

논쟁이 끝나기를 소망하여 이에 서명하였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를 포함한 극소수만이 서명을 거부하였다.

희의는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직분을 박탈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틴은 자기 자신이 내린 처벌을 첨가하여 면직된

감독들을 자기들의 도시에서 축출해 버렸다. 그러나 교희 문제에 세속적 처벌을 첨가한 행위는 그 후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왜냐하면 교리의 정통 여부 문제에 관하여 세속 권력이 개입한 전례를 남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독들의 소망과는 달리 니케아 종교 회의가 문제의 논쟁을 종식시키지는 못하였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뛰어난 정략가였으며, 일설에 의하면 황제의 먼 친척이었다 한다. 그는 우선 콘스탄틴을 회유하는데

진력하여 얼마 후 니코메디아로 귀향하였다. 니코메디아에는 황제의 여름 별장이 있었으므로 유세비우스는 다시

한번 콘스탄틴에게 호소하였다. 결국 황제는 아리우스파에 대한 자기의 조처가 지나쳤다고 결정하였다. 아리우스

자신도 귀양에서 풀려났으며, 콘스탄틴은 콘스탄티노플 감독에게 그를 성찬에 참여시키도록 명령하였다. 그런데

감독이 황제와 그의 신앙 양심 중 어느 쪽을 따를 것인가? 고민하던 가운데 아리우스는 사망하였다.

328년에는  얄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가 사망하였다. 그의 뒤를 계승한 아타나시우스는 이제 니케아 정통 신앙의

수호자가 되었다. 이 무렵에 니케아 신앙을 지키는 지도자들 중 대부분이 함께 유배되었다. 콘스탄틴은 임종

직전에야 결국 세례를 신청하였는데, 이를 베풀었던 인물은 다름아닌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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