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2000년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주요 사건 열전 - 초기의 이단들(영지주의) ②
- 작성자 : Henry Park
- 21-08-02 16:12
10-2) 영지주의 ②
Ⅱ. 영지주의의 특징과 체계
1. 주요 특징
영지주의 체계는 다음과 같은 전형적인 특징들을 가진다.
(1) 공통 된 신앙의 근원
영지주의자들의 신앙과 체계는 아주 다양하지만 그러나 공통 된 한 가지 신앙의 근원이 있다. 그것은
영지주의자들이 심원하고 지고한 신성의 존재로 믿는 모나드(Monad)이다. 모나드는 영지주의자들이 믿는 지고한
최고의 신인데 이 모나드(Monad)를 그들은 플레로마(to fill up or to complete) 또는 비토스(the bottom, the depth)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나그 함마디의 ‘요한의 비밀 가르침’이라는 문서를 보면 영지주의자들의 이 지고한 존재
모나드에 대해 예수님이 이렇게 사도 요한에게 전했다고 그들은 말하고 있다. 모나드(Monad)는 그것을 지배하는 그
어떤 것도 없는 그런 군주이다. 모나드는 최고신으로서, 만물의 아버지로서, 만물 위에 거주하는 불가시의 존재로서
존재한다. 모나드는 한계 지을 수 없는데 모나드를 한계 지을 수 있는 그 무엇도 모나드 이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나드는 순수하고 신성(神聖)하며 오염이 없는 무한한 빛이다. 모나드는 완전, 축복, 신성 속에 이것들을
훨씬 뛰어넘은 존재이다. 모나드는 유도 무도 아니다. 모나드는 큰 것도 작은 것도 아니다. 모나드는 이런 크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거나 또는 이런 특질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모나드가 광대무변(vastness)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나드는 무한한 단순성을 가지고 있다. 모나드는 아이온(aeon, 영원)들을 낳는 아이온이며, 생명을
주는 생명이며, 축복을 주는 축복이며, 지식을 주는 지식이며, 선을 주는 선이며, 자비와 구원을 주는 자비이며,
은총을 주는 은총이다. —.《요한의 비밀 가르침(The Apocryphon of John)》
여기서 우리는 영지주의가 기독교에 비해 우월한 종교라는 것을 과시또는 공존하기 원했던 영지주의자들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다.
(2) 공통 된 신(神)들의 탄생 설화
영지주의 체계에 따르면 지고한 모나드적 근원으로부터 발출을 통해 나타나는 하위 신적 존재인 여러 아이온들
(aeons)이 있다. 이들은 신이지만 동시에 자신들이 분리되어 나온 근원인 지고한 신성의 속성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은 이러한 신적인 존재들의 발출은 점차 하부 구조로 내려갈수록 궁극적인 근원으로부터
멀어지는 존재들로 이해했고 이에 따라 하부로 내려갈수록 신성구조에 불안정성이 증가 된다고 생각했다.
(3) 물질계의 창조자 데미우르고스
영지주의 체계에는 물질계, 즉 물질로 이루어진 우주를 창조한 지고한 존재와는 별개의 독립적 창조자 데미우르고스
(demiourgós)가 있다. 이는 환영이자 유일한 지고의 근원으로부터 가장 늦게 분리되어 나온 신이다. 이 신은 최하위의
신이며 열등하고 거짓된 신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이 창조의 신을 플라톤주의자들이 사용하던 그리스어 낱말에서
따와 ‘데미우르고스’라 불렀다. 이 말의 원래 의미는 ‘공공 작업자’, ‘작업 에너지’, ‘숙련된 작업자’ 등을 뜻하는
말이었는데 영지주의자들은 이 말을 ‘대중의 신’ 또는 ‘거짓 신’이라는 뜻으로 ‘데미우르고스’라고 한 것이다.
물질계의 창조자 데미우르고스 신의 탄생 즉 발출은 우주에 특히 물질계와 관련하여 지고의 신이 어떤 의도하지
않은 커다란 부정적인 사건이었다. 이것은 지고의 신성의 일부인 우주의 구조에 이전에 없었던 큰 불안정성 또는
무질서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4) 부정적인 존재 데미우르고스
영지주의에서 묘사되는 데미우르고스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Timaeus)와 ‘국가’에 나오는 존재들과 유사하다.
티마이오스에서 데미우르고스는 중심적 존재이며 물질계를 창조하는 자애로운 창조자로서 물질적인 한도 내에서
우주를 자애롭게 만드는 작업을 행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또 ‘국가’라는 작품에서 소개 된 소크라테스의 영혼에 대한
묘사에서 욕망이 사자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는 대목은 영지주의에서 데미우르고스가 사자의 형상으로 묘사되는
것과 유사하다. 이런 묘사와 관계가 있는 구절들은 ‘나그 함마디 문서’ 중에 있는 주요한 영지주의 문서들 중
하나에서도 발견되었다. 이 문서에서는 데미우르고스를 사자 얼굴을 한 뱀으로 묘사하는 문장도 있었다. 이러한
형상을 얄다바오트(aldabaoth) 사마엘(아람어: 눈먼 신) 또는 사클라스( sækla, 어리석은 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데미우르고스가 때때로 지고한 신성에 대해 무지하며 어떤 경우에는 신성에 반대되기도 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국가’에서 묘사되는 데미우르고스는 악의적인 존재이다.
(5) 영혼의 장애자 데미우르고스
악의적인 신으로써 데미우르고스는 불완전한 물질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고통을 초래하였으며 유대교의 창조주
여호와나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나 영지주의 지고의 신의 한 단계 하위인 누스(Nous)와 같은 그런 신이 아니었다.
부정적인 물질계의 창조자 데미우르고스는 상위의 신들에게는 영혼을 타락시키는 영혼의 장애자였기에 신들의
세계에서 소외 대상이었다. 그러자 데미우르고스는 아르콘(Archōn: 지배자, 주인, 主)이라 불리는 일군의 동료
지배자들을 창조하여 이들로 하여금 물질계를 주재하게 하며 때로는 물질계에서 상위 세계로 올라가려는 영혼을
가로막는 장애자가 되게 했다.
(6) 물질은 영혼의 장애물
영지주의자들은 물질계는 결함이 있거나 오류의 산물이지만 그러나 물질이 허용하는 한도 안에서는 선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더 높은 수준의 실재 (영지주의의 영)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보았다. 이 세상의
열등함은 그림이나 조각 또는 수공예로 어떤 실재 대상을 표현할 때 그것은 모방이기 때문에 실재에 비해 열등할 수
밖에 없는 것과 같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은 이같은 물질계에 대한 부정적 생각 때문에 금욕주의적인
경향으로 흘렀다. 또 일부는 세상 물질과 인간의 육체는 의도적으로 인간을 옥죄는 감옥과 같이 악한 것으로 인식
하여 극단적인 금욕주의로 발전하기도 했다.
(7) 인간의 현 상태에 대한 신화적, 시적 묘사
영지주의자들의 이러한 생각은 신격이 물질계로 내려와 특정한 인간의 육체에 기거한다는 신화적이고 우주적인
드라마로 설명될 수 있다. 영지주의자들의 생각에는 인간 내면에 내재된 신격은 구원에 이르는 각성의 과정을 거쳐
상위의 세계로 올라갈 수 있게 한다. 따라서 개인의 구원이란 개인에 내재하는 신성의 복원이라는 것이며 따라서
영지주의 운동의 가장 중요한 초점은 이 같은 개인의 구원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지주의의 이 같은 특징은 시리아와 이집트의 영지주의 운동에만 한정된다. 왜냐하면 마니교와 만다야교 등
페르시아 지역에서 있었던 영지주의 운동은 이와는 달리 그들만의 고유한 종교 양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실 영지주의 운동이라는 용어는 시리아와 이집트의 영지주의 운동 만을 일컬으며 페르시아 지역의
영지주의 운동은 마니교라고 칭하는 것이 정확한 것이다.
사람들에게 영지주의 운동이 호감을 주었던 것은 생각이나 행동에 있어 어떤 종교적 계율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다른 종교들에 비해 훨씬 자유롭고 독특한 개인적인 신앙의 형태라 해도 다 용납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독립적인
개인 신앙과 뛰어난 지식을 추구한다는 영지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관념은 기독교를 불완전하게 받아들인
많은 사람들로부터 크게 환영을 받았다. 그 예로 발렌티누스주의 신봉자들은 어떤 종교의 교리를 진리라고 믿고 받아
들인다는 것은 지적으로 이해하거나 감성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지주의자들은 다양한 시대에 걸쳐 활동하였다. 이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기원했던 것으로 보이며 4세기까지는
초기 기독교인들과 공존하였다. 영지주의자들에게는 규정된 집회나 조직 형태가 없었기 때문에 기존의 종교나 새로
생겨나는 종교와 쉽게 하나가 되었다. 영지주의의 이런 특징에 대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하드리아누스 재위
기간에 이단적인 교리 창시자들이 나타났고 이들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때까지 남아 있었다.”]라고 말했다. 타 종교와
쉽게 동화되고 섞이는 영지주의가 오래 지속되고 있는 것을 가리킨 말이다.
1세기 후반부터 2세기까지의 영지주의의 주된 교리를 더 깊이 이해하는 데는 우리가 당시의 정통 기독교와 영지주의
운동과의 관계를 자세히 아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영지주의 운동에 대해 부분적으로 밖에 알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전에 영지주의에 대해 알려진 지식의 대부분은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요약문과 논설에 남아있는
자료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5년 영지주의 운동에 대한 중요한 문서자료인 ‘나그 함마디 문서’가 발견되면서 우리는 특히 초기 영지주의 운동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2세기 말 당대 유명한 기독교 신학자였던 이레네이우스는 자신의 논문 ‘이단 교리에 대한 반박’에서 “영지주의
운동이 모든 도덕률을 개인의 변덕에 맡기고 있으며 어떤 고정된 형태의 신앙 규칙을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게 한다.”
고 말했다. 또 2세기의 교부들 중 하나이며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주요 인물이었던 클레멘트는 자신의 저서
‘스트로마타’를 통해 바실리데스와 발렌티누스의 추종자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 이유는 영지주의 자들이 세례의
유효성을 부정함으로써 이 성스러운 예식에 약속 된 하나님의 은혜를 부인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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