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2000년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주요 사건 열전 - 초기의 이단들(영지주의- 마니교)
- 작성자 : Henry Park
- 21-08-16 14:27
10-4) 페르시아 영지주의 (마니교)
고대 이란 지역 즉 페르시아의 영지주의는 시리아와 이집트의 영지주의와는 다른 전통이라는 견해를 가진다. 기원 후
5세기에 사산 제국(Sasanian Empire, 226~651) 시대의 페르시아에서는 마니교( 3~8세기)를 금하였지만 그때는 이미
마니교가 동쪽과 서쪽으로 널리 퍼진 상태였고 다른 지역으로의 계속적인 확산을 막기에는 이미 늦은 시기였다는 것이다.
마니교의 가르침이 서쪽으로는 시리아, 북 아라비아, 이집트 그리고 북아프리카로 전파된 상태였다. 예를 들어
북아프리카에서 태어났던 어거스틴은 373~382년 동안 마니교의 신자였다. 이후 마니교는 시리아로 부터 계속 확산되어
팔레스타인과 소아시아 그리고 아르메니아로까지 전파되었다. 기원 후 4세기에 로마와 달마티아에서 마니교인들이
있었다는 증거가 있으며 또한 골과 스페인에도 마니교인들이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마니교는 로마 제국의 특권 계급들과 논객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마니교는 기원 후 6세기 까지 널리
믿어지고 있었으며 중세의 바오로파(Paulicians: 650~872), 보고밀파(Bogomils: 927-970) 및 카타리파(Cathari)의 역사
무대의 출현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마니교는 결국 로마 가톨릭에 의해 이단으로 단죄되어 그 후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7세기에 발흥한 이슬람교의 확산으로 기독교와 조로아스터교에 의한 종교적 독점 상태가 깨지게 되었는데 이 같은 상황에
힘입어 마니교는 오히려 동쪽에서 크게 번성할 수 있었다. 이슬람교의 초기 정복 기간에 마니교는 페르시아
(지금의 이란)에서 신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교육받은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마니교가 가장
번성한 곳은 중앙아시아였다. 마니교는 지금의 이란을 통해 중앙아시아로 전파되었다. 중앙아시아에서 마니교는
기원 후 762년 위구르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마니교(摩尼教, Manichaeism)는 예언자 마니에 의해 창시된 종교로 완전히 독립적인 종교 운동이었으며 지금은 거의
완전히 사라진 종교이다. 마니교의 문헌들 또는 성전(聖典)들은 대다수가 완전히 상실된 것으로 여겨졌었는데 일단의
문헌들이 발견되어 마니교를 재조명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 문헌들은 쾰른 마니 코덱스(Colon Mani Codex)라고
부른다. 쾰른 마니 코덱스는 현재 독일의 쾰른 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쾰른 마니 코덱스는 예언자 마니의 생애에 대한
내용들과 그의 가르침들과 주장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련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니교는 여러 유대교와 기독교 분파들 중 그 어느 분파와도 신앙체계와
수행체계가 일치하지 않았다. 이는 마니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참된 신은 물질 세상 즉 물질 우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모세와(모세의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들과
유대인들의 사제들과 이야기하였던 존재는 다름 아닌 바로 어둠의 군주였다. 그러므로 (지금 시대의) 기독교인들, 유대인들,
그리고 이교도들이 이 신을 숭배할 때 이들은 (모세와 모세의 율법을 따르는 유대교 사제들이 빠졌던) 동일한 오류 속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이 신은 그 자신이 그들 — 모세와 모세의 율법을 따르는 유대교 사제들에게 가르쳤던 욕정 속에서
이들, 지금 시대의 기독교인들, 유대인들, 이교도들 이 길을 잃고 타락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마니교는 초기 기독교와는 전혀 별개였으나, 마니교가 영지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간접적으로 초기 기독교를
공격하는 여러 이단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비록 로마 천주교가 마니교를 단죄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제국 내의 마니교도를 의식해서인지 몇몇 마니교의 예배 풍습(사제의 제의, 상급 사제의 손과 발에 키쓰하는 것,
등등)이 현재까지도 로마 천주교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 심히 유감스럽다.
창시자와 교세
마니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중간 즉,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에서 태어나서 24세 때 신의 계시를 받고 포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아브라함과 붓다와 예수와 조로아스터로 이어진 예언자 중 마지막 예언자라고
주장했다. 마니는 말년에 페르시아 황제로부터 “빛의 사도의 고통”이라고 불린 26일 간의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죽었다.
마니의 사후에도 교세가 확장되어 북아프리카를 거쳐 4세기에는 로마와 스페인에 까지 교회가 세워졌고 기원
7세기에는 중국 황실에 선교단이 들어가 포교 활동을 허가 받았으며, 8세기에는 위구르의 국교로 채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9세기에는 중국에서 마교(魔敎)로 몰려서 종교 활동이 금지되었고, 10세기에는 사라센제국(Saracens) 아바스
왕조(Abbs, 750-1258)의 박해를 받아 교세가 크게 축소되었고 14세기 이후에는 지상에서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사라센’은 시나이 반도의 유목민을 가리키는 말로서 흔히 이슬람이 세운 모든 왕조를 통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주요 교리
1) 이원론: 조로아스터교와 유사한 이원론에서 출발했다. 즉 세상은 선(善)인 빛의 세력과 악(惡)인 흑암의 세력과의
부단한 전쟁터이다. 영은 선이며 물질은 악이므로 물질로 구성된 인간의 몸은 엄격한 규칙생활과 고행과 금욕으로
다스려야 한다.
2) 신정론(神正論, theodicy): 악의 존재를 신의 섭리로 생각한다.
3) 영지주의(Gnosticism): 영적 지식(靈知, gnosis)으로 윤회의 사슬을 피하고 구원에 이른다
4) 금욕주의: 신도를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는 ‘선택받은 자’와 노동과 헌금으로 그들을 돕는 청강자(auditores)“로
나누었다. 성례의 세 요소는 공동체 생활속에서의 기도와 자선과 단식이며 고백과 찬미도 중요한 요소라고 했다.
5) 구원: 청빈과 금욕과 독신생활을 통해 간음, 출산, 치부(致富), 육식, 음주 등의 속된 것을 피하고 명상과 수도로
영적 지식을 쌓아야 저주 받은 윤회의 세계 속에 빨려들지 않고, 온전한 영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
조로아스터교와 기독교 교리를 적당히 채용한 모방 종교의 하나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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