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2000년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주요 사건 열전 - 초기의 이단들(非영지주의- 몬타니즘) AD 120년 경
- 작성자 : Henry Park
- 21-09-15 15:26
11-1) 몬타니즘
콘스탄틴 황제가 313년 밀라노 칙령을 선포하여 기독교를 공인할 때까지, 초대교회는 약 280년 동안 여러가지 전쟁을 치러
나가야 했다. 유대교의 시기와 방해, 교회를 없애려는 로마제국의 탄압, 그리고 이단의 침투와 분파 등에 대한 전쟁이었다.
박해가 교회 외부로부터 오는 공격이라면 이단의 발흥은 교회 내부에서 오는 공격이었다.
당시 일어난 이단들은 대체로 세 가지 부류였다. 유대 전통에서 나온 율법주의적 이단, 그리스도 철학과 동방의 이원론
(二元論) 사상과 혼합된 데에서 나온 이단(영지주의), 그리고 현실 생활을 무시한 신비주의적 가르침에 치중한 잘못된
성령운동 격인 이단 등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유대교적 이단으로는 예수는 신격화된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에비온 주의가 대표적이고, 헬레니즘과
영지주의에서 나온 대표적 이단으로는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부정하는 가현설(假現說, Docetism), 마르시온주의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리고 종말론적이고 신비적인 이단으로는 2세기 중엽에 등장한 몬타니즘이 있었다. 이들은 초기 교회에
홍수처럼 밀려온 매우 위험하고도 강력한 도전이었다.
교회의 신상을 위협하는 운동이나 가르침이 나타났을 때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것을 반격하고 성경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입각해서 정통교리를 정립하려고 했고, 때로는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그들을 정죄하기도 했다. 각종 이단적 교리들이 교회
내에 침투했을 때 교회의 지도자들은 당연히 위기의식을 느꼈으며 힘을 합하여 대처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도 철학자들과
이단자들로부터 교회를 지키려는 노력을 경주했지만 교회들이 연합하여 대처해 나가도록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영지주의 적인 초대교회의 이단들에 대하여 논하였지만 영지주의와는 상관없이 초대교회를 힘들게 했던
몬타니즘, 도나티스트, 그리고 아리우스 주의에 대하여 계속 글을 쓰고자 한다.
몬타니즘(Montanism)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면서 신앙을 지켜나갔다. 그러나 속히 이뤄지리라 여겼던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자 뜨거원던 종말 신앙은 점점 퇴색했다. 몬타누스주의는 이처럼 신앙이 약화되고 경직되는 경향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났다.
이 운동은 이방 종교의 사제였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몬타누스가 160년경 소아시아 프리기아에서 성령이 자신에게
임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몬타니즘 운동은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자 그리스도를 인정했고, 교리적인 면에서
영지주의나 마르시온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성령의 사역에 대한
몬타누스의 잘못된 견해 때문이었다. 몬타누스는 자신의 가르침을 새 예언(new prophecy)'이라고 하면서 방언과 열광적인
엑스터시의 체험을 강조했다.
몬타누스는 그를 통하여 성령의 시대가 도래했으며, 자신과 그를 돕는 두 여사제 프리스킬라와 막시밀라를 통하여 성령은
말씀하신다고 했다. 그들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프리가이 지방의 페푸자
(Pepuza)라는 도시 근처에 세워지게 되어 있다고 하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일에서 떠나 페푸자로 가서 종말을 기다려야
된다고 했다. 그들은 임박한 종말을 대배하면서 결혼을 금하고 금식과 엄격한 금욕생활을 실천하였으며 순교를 장려했다.
3세기에 들어서 몬타누스주의 운동은 큰 힘을 얻었는데, 그것은 후대에 서방 교회 신학의 시조라고 불리는 카르타고의
터툴리안이 이 운동의 염격한 도덕 생활과 금욕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일시 합류했기 때문이다.
몬타누스 주의자들은 초기 교회의 종말론적 긴장을 되살렸고, 임박한 종말에 대한 확신과 성령의 특별 계시를 강조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소아시아 교회의 감독들은 160년 직후에 교회 회의를 소집하여 177년 몬타누스를 이단으로 정하였고,
교회의 결속을 위하여 감독의 지위와 권한을 강화시켰다. 이것이 교회 역사상 최초의 공회(Symod)였다.
그 후 비슷한 유령의 성령 운동이나 예언 운동이 계속 나타났으며, 사도적 신앙을 계승하려는 교회가 계속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이러한 여러 이단들의 활동으로 부터 진리를 수호하고 성도를 보호하려는 여러 움직임을
보였다. 그것은 교회들의 연합, 정경(正經)과 교리의 확립, 이단자들에 대한 정죄와 축출 등으로 나타났다.
참고로 ‘왜 터툴리안은 몬타니즘에 빠지게 되었는가?’를 논한 조덕영 박사의 글을 소개한다. 물론 조덕영 박사의 글에
필자가 전적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필자는 근본주의자라고 불리우거나 공격받는 것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
1. 터툴리안(주후 150년경-215?220?)의 저서들은 둘로 나뉜다. 초기의 정통 서술과 후기 몬타니즘적 경향의 저술들이다.
몬타니즘은 2세기 후반 소아시아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프리기아(Phrygia)에서 열광주의와 계시문학적 종말론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 황홀경을 체험한 신비주의 밀교 사제 출신의 몬타누스로부터 시작된 몬타니즘은
3세기 초 터툴리안이 사는 북아프리카에도 상륙하였으며 터툴리안은 이 운동에 즉시 가담하였다.
2. 카르타고에서 로마군의 백부장의 아들로 태어나 라틴신학(북아프리카학파)의 아버지로 불리운 터툴리안은 철학에도
비판적이었던 대단히 신앙적으로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What has Athens to
do with Jerusalem?)라는 터툴리안의 유명한 말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이 말은 터툴리안이 헬라 철학에 대해 신학적으로
반대편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즉 철학에 대항하여 그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est)라고
했다.
내재(內在)의 철학에 반감을 가진 터툴리안의 이 같은 열정적 초월 신앙은 그가 황홀경을 강조하는 열광주의자들로 이적과
예언 은사를 강조하고 오늘날의 오순절적 운동과 유사점이 많은 몬타누스파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라고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아프리카로 알렉산드리아 신학이 철학을 바탕으로 기독교 신학의 형이상학적 진리에 접근한 반면,
터툴리안은 법률이나 정치 등의 실체적인 문제를 가지고 기독교의 역사성을 실천적으로 접근했다. 이런 성품이 잘못
발휘되면 도덕률을 중시하는 율법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양 극단은 아이러니하게도 한 점에 수렴되기도 한다. 즉
율법주의가 초월주의자들과 만나면 극단은 서로 통하기도 하는 법!.
3. 따라서 당시 몬타니즘 주의자들의 금욕(결혼 포기, 재혼 금지, 동정성 강조 등)과 금식 그리고 순교에 대한 열망, 깊은
참회 등의 엄격함에 매력을 느꼈을 거라는 것이 학자들의 평이다. 그렇게 독신 생활을 찬양한 몬타니즘의 경향을 따라
터툴리안도 독신을 지킨다. 터툴리안은 일종의 열광적 근본주의자였던 셈이다. 근본주의자들이 본의 아니게 분열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고 초월주의자들과 통하는 면도 많다.
4. 엄격함에 매력을 느끼는 근본주의자였기에 터툴리안에게 있어 처벌은 용서보다 우선하는 것이었다.
5. 오늘날 우리 기독교도 화평과 희락과 자비를 잃어버리는 경향이 강하다. 터툴리안은 "간음과 우상숭배 죄를 지은
사람들의 회개를 수용하고 사면령"을 내린 카르타고 감독의 결정에 대단히 반감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터툴리안이
어떤 성품의 소유자였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6. 터툴리안은 도덕적 강경론자, 엄격주의자, 도덕적 근본주의자로서 정통 교회의 처신에 분노하여 열광주의적이고
금욕적인 몬타니즘으로 돌아섰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터툴리안에 대해 그는 신학적으로 거의 유대인이라고
비난하였다. 이것이 해답의 실마리가 아닐 까 생각한다.
7. 삼위일체(Trinitatis), 본체(substantia, 실체로도 번역), 위격(persona), 그리스도의 양성(Christi duo naturae), 만족
(satisfactio) 등은 그가 처음 사용한 중요한 신학 용어 였다. 그렇다고 그가 지속적인 바른 신학을 전개한 것은 아니었다.
터툴리안은 <로고스>(말씀)이 본래 하나님의 비인격적인 이성이었으나 창조 시에 인격이 되었다는 주장을 편다. 이것은 한
인격이 다른 인격에 관여한다는 일종의 종속적 견해이다. 그리스도의 양성에 대해서도 혼합이 아니라 결합
(conjunction)이라는 낯선 용어를 쓴다. 이 같은 신학자가 몬타니즘으로 돌아선 것은 신학 정립의 여명기에 발생한 인류가
가진 안타까운 한계였다고 본다.
8. 오늘날도 여전히 바른 신학을 구별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니 터툴리안의 경우는 초대 교부시대에 당연히
일어난 아쉬운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만큼 바른 신앙과 신학을 정립한다는 것은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왜 완벽한
교리를 성경에 직설적으로 기록하거나 초대교회 완벽한 인물을 보내 일치 교리를 만들게 하지 않아 미로 찾듯 난제를 풀어
가야 하게 된 것인지 인류는 하나님의 그 깊은 섭리를 온전히 알 수는 없다. 물론 이것조차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고
보아야 겠다. (삼위일체론만큼 기독론도 어려운 부분이다. 인간은 삼위일체도 아니고 양성도 아니니 인간이 이 부분을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
키릴과 네스토리우스 사이에서 벌어졌던 이 기독론 논쟁이 그런 경우이다. 둘은 모두 황제의 노여움을 사 감금되었으나,
결국 레오 황제의 주선으로 칼세돈 신조의 골자를 이루는 <통합신조>에서 “신성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시며,
그의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동일 본질이시다. 양성은 연합을 이루셨으니 그러므로 우리는 한 그리스도, 한 아들, 한 주를
고백한다(생략)”로 정리되었다.
이것이 칼세돈 신조에서 “혼합하지도 변하지도 않고 구분되지도 않고 구별되지도 않는 두 본성을 지닌 분으로 인정해야
하며, 이 두 본성의 구분은 결합의 이유로(연합으로 인해) 폐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각 본성의 독특한 특성은 보존되고,
하나의 위격과 하나의 존재 안으로 동시에 발휘된다(생략)”로 정리되었다.
이것이 유티케스 정죄와 훗날 루터주의와 칼빈주의 사이의 성례론 논쟁으로까지 연결되니 삼위일체도 아니고 양성도 아닌
인간이 부족한 바벨탑 이후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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