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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2000년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주요 사건 열전 - 초기의 이단들(非영지주의- 도나티스트파) AD311년 경



11-2) 도나티스트파


도나티스트들의 출현 배경

AD 311년에 시실리안(Caecilian, 시실리아누스)이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임명되는 임직식에 북아프리카의 감독

 펠릭스(Felix of Aptunga)가 참석했다. 그는 박해 기간에 성경을 버린 사람이라고 비난받고 있었다. 일부 사람들은

그런 펠릭스가 안수하여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감독이 된 시실리안의 감독 안수식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이어서

시실리안의 감독 안수식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마조리누스(Majorinus)를 감독으로 선출하였고, 마조리누스가 곧

바로 죽어 도나투스(Donatus)가 감독직을 계승했다.

그때 도나투스를 따르는 사람들을 그의 이름을 따서 ‘도나투스파(Donatists)’라고 불렀다. 도나투스파(派)에 속한

사람들은 대부분 북아프리카의 원주민들로, 그 당시에는 이들을 ‘누미디아인’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로마제국의

지배에 대해 은연중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콘스탄틴과 시실리안의 그들에 대한 차별적인 정책이 불만을 더욱

고조시켰다.

도나투스는 도나투스파 교회를 ‘때묻지 않은 순교자 교회’라고 말하며, 카톨릭(보편) 교회(로마 천주교가 아니다)가 준

세례를 인정하지 않았다. 도나투스파들은 ‘교회는 거룩하며, 교회는 거룩한 성도로만 이루어져야 하며, 모임의

지도자들은 거룩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콘스탄틴과 카톨릭의 도나티스트 박해

도나투스파(도나티스트)들은 배교자(背敎者)의 안수를 받은 시실리안의 성직 자체가 무효라고 주장했다. 반대로

시실리안과 그의 지지자들은 문제의 감독이 배반자가 아니었으며, 설령 그가 배반자라 할지라도 그가 행한 성직

임명 자체는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AD 314년, 교회는  콘스탄틴에게 카톨릭과 도나티스트들 사이에 중재자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콘스탄틴은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세례에 의해 거듭난다는 것은 마귀의 교리’라고 주장하는

도나티스트들에 의해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황제는 도나티스트들을 극단적 분리주의자로 보아 온건파인 카톨릭(보편)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후로 콘스탄틴이

기독교에 베풀었던 관용은 사라졌다. 결국 콘스탄틴은 도나티스트들을 사형에 처하고 카톨릭(보편) 측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도나티스트들은 ‘교회는 거룩한 성도로만 이루어져야 하고, 황제의 명령을 따르는 것을 거부해야 하며, 자신들의

교회만이 참 교회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구별된 그리스도인의 모임인 교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변질된 교회로

부터 분리되어 나왔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교회를 세우고, 카톨릭 교회에서 행하는 유아세례를 단호히 거부하며,

유아세례를 받은 이들에게는 다시 세례를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세례하는 교인들’ 즉 ‘재세례 그리스도인들

(Anabaptist)’이라고 불렸다. 그로 인해 그들은 이제 로마제국이 아닌 교회의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세례에 의해 거듭난다’는 교리와 유아세례는, 배교자(背敎者)들이 전통이라고 부른 것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도나티스트들은 진정한 회개와 믿음의 증거를 보이는 사람들만이 함께하는 순수한 교회를 강력히 주장했다. 초기

도나티스트들은 바른 신앙과 뛰어난 인격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러한 도나티스트 교회의 교세가 확장되고 교회가 영향력을 행사하자, 콘스탄틴은 그들을 핍박한 것이다.

도나티스트들은 “황제가 교회와 무슨 상관인가? 그리스도인들이 왕과 상관할 일이 무엇인가? 법정에 교회 감독이

참예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라고 되물었다. 도나티스트 설교자들은 카톨릭을 이 세상의 군주와 간음을 범한

교회라고, 그리고 타락한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이야말로 황제가 고용한 가련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며, 그러한

교회에서 분리되어야 한다고 했다.

콘스탄틴의 아들 콘스탄스의 박해

도나투스 주의는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펼쳐진 새로운 시대 상황에 대한 응전이었다. 콘스탄틴의 아들

콘스탄스는 아버지의 영토인 북아프리카를 이어받자, 처음에는 도나티스트들을 회유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도나티스트들에게 교회로 돌아올 것을 명하는 칙령을 발표하고(AD 340), 그리스도께서 일치를 사랑하는 분이셨으니

일치가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 콘스탄스는 곧 박해의 칼을 뽑아 도나티스트들의 교회를

박해했다. 그의 칼 아래 쓰러진 희생자들은 살아남은 도나티스트들에게 순교자가 되었으며, 그들의 무덤은 저항을

선포하는 강단이 되었다. 도나투스도 추방되어 유배생활을 하던 중에 죽음을 맞이했다.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 이후 어떤 사람들은 박해의 종식을 그저 기뻐하며 로마카톨릭에 동화되어 갔지만, 어떤

신자들은 신령한 세계를 추구하여 사막을 찾았고, 또 어떤 무리는 도나티스트들처럼 ‘제국의 동지’로 변한 카톨릭

교회와 단절하고 대항했다.

콘스탄스 이후 도나티스트들의 부흥과 박해

도나티스트들의 성장은 급속도로 빨리 전개되어, 오차드(Orchard)에 따르면 한때는 일반 신자들과 숫자와 비슷할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북아프리카의 교회들은 도나티스트들이 장악했다.

‘오프타투스’는 도나티스트 감독과의 논쟁에서 ‘세례는 장소나 사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며, 세례의 권위는

성(聖)삼위(三位)의 이름으로 주기 때문에 주는 사람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도나투스의 후임자인

‘파르메니아누스’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성삼위의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그 안에 어떠한 선한

것도 지니지 않은 죄인이 어떻게 하여 주님이 주신 귀한 축복을 줄 수 있겠는가?’라고 반박했다.

오차드는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와 동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가 저지른 도나티스트에 대한 학살 만행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두 황제는 칙명을 내려, 세례를 받았던 사람이 다시 세례를 받거나 다시 세례를 주는 사람은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그러한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내세워 결국 잔인한 학살이 이어졌다.”

기본(Gibbon)에 따르면, 300명의 목사가 교회에서 추방당했고, 몇몇은 섬으로 추방당했으며,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겼다. 또한 아프리카에서 그들이 다시 활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더 이상 교회를 만들지 못하도록 제재를

가했다고 한다.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 교회에 대해 “도나티스트 교회 사람들은 모두 세례를 다시 받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단적이다.”라고 말했다.

5세기에도 도나티스트 교회는 로마천주교회와 심한 갈등을 겪었다. AD 415년, 어거스틴은 회의에 92명의 감독과

목사들을 불러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선언하기를, 새로 태어난 아기는 영생을 얻을 권리가 있으며, 어머니의 태로부터 태어난 아이들은 죄를 안고

더럽게 태어나기 때문에 그 원죄를 없애기 위해서 모든 아이들은 세례를 받아야 한다.”

이러한 선언으로 인해 도나티스트 교회는 많은 타격을 받았다. 많은 도나티스트들이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러한

박해를 피해 많은 사람이 스페인과 이탈리아로 옮겨갔고, 어떤 이들은 아프리카에 머물면서 변질되어 있는 무리들에

맞서 진리를 위해 끝까지 싸우기도 했다. 그들은 암흑 시대에 참 신앙을 지키기 위해 광야로 쫓겨다니며 복음을

전파했던 왈도파 그리스도인들과 맥이 닿아 있다고나 할까?.

주후 396년에 히포의 주교가 된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들이 교회로 돌아오도록 간곡하게 설득했다. 그는 대중

찬송을 작사해서 일반 대중이 도나티스트 교회의 기원과 오류를 이해하도록 돕는 한편, 특히 「도나티스트들을

논박한 세례론」(De baptismo contra Donatistas, 400)과 「교회의 일치에 관하여」(De unitate Ecclesiae, 405)라는

책을 써서 도나티스트들의 오류를 비판했다. 그렇다면 어거스틴이 도나티스트 분열주의에 직면해서 내세운 교회론의

핵심은 무엇인가? 어거스틴은 앞에서 언급한 카르타고의 주교 선임을 둘러싸고 두 진영이 대립각을 세우게 된 것이

도나티스트 논쟁의 발단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교리적으로 말해서 '재세례'(rebaptism)와 '재성별'(reordination)의

필연성으로 요약된다. 다시 말해, (1) 배교해서 죄를 지은 목사가 베푼 세례식은 부당하므로 깨끗한 목사에 의해서

재세례를 받아야만 하는가? (2) 배교해서 죄를 지은 감독이 안수해서 성직 서품을 받은 목사는 깨끗한 감독에 의해서

재성별 되어야만 하는가?

   이 두 문제와 관련해서 도나티스트들은 교회의 거룩성이 교인들의 거룩성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성경을

당국에 건네줘 배교한 사람들은 자신의 죄된 행위로 인해 이미 그리스도의 은총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거룩한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으며, 그들이 받은 혹은 베푸는 세례와 성만찬, 즉 성례전 역시 무효가 된다고 보았다. 바로 이런

이유로 배교자에 의해 성직 서품을 받은 시실리안의 성직은 무효이며 절대로 카르타고의 감독 될 수 없다는

논지였다. 단지 성직 안수뿐만 아니라, 배교자들이 베푼 세례 역시 무효가 되므로 세례를 다시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도나티스트들의 주장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세례와 같은 성례전의 유효성은 이를 집전하는, 인간 목사의

주관적 거룩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신적 제사장인 그리스도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반박했다. 즉 세례의

객관적인 타당성은 교회와 성례전의 원천이 되시는 그리스도 한 분으로부터 온다는 것이었다. 참된 교회의 표식인

거룩성은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요 교회의 창설자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요지였다.

"그리스도께서 치유하시고 깨끗케 하시고 의롭게 하신다"(「Sermones」292. 6). 결국 도나티스트들의 자기의(self-

righteousness)에 근거한 비난과 정죄는 성도의 양심에 현존하시는 성령의 표식인 '사랑'을 훼손하는 일이었고,

그들의 분열주의는 참된 교회의 표식인 교회의 '일치성'을 파괴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어거스틴은 무엇보다도

배교자들과 같은 죄인들은 교회의 신자가 아니라는 도나티스트들의 주장을 심각하게 논박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어거스틴은 알곡과 쭉정이가 '혼합된 교회'(permixta ecclesia)를 강조함으로서 죄인들을 교회로

부터 배제시키지 않으려 했다. 교회라고 해서 100% 참 신자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거짓 신자도 한데 뒤섞여 있다.

마치 야곱의 한 쪽 다리는 성하고 다른 한 쪽 다리는 절뚝거린 것처럼, 한 그물 안에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함께 걸려 있듯이, 포도즙 틀에 찌기와 순수 포도즙이 뒤섞여 있듯이, 노아의 방주에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동승했던 것처럼, 솔로몬이 재판했던 두 창녀들처럼 거짓과 증오로 압도된 신자와 진실과 사랑으로 가득찬 신자가

한 집 교회 안에 공존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례전 역시 그 예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영적이며 도덕적인 주관적 우수성과 상관없이 이 성례를 가능케

하는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유효성에 따라 거룩성 유무가 결정되어질 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틀이 교회로 돌아 올 경우 재세례나 재성별식을 따로 요구하지 않았다.

   불완전한 지상 교회는 완전한 천상 교회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어거스틴은 역사적이고 경험적인 '보이는 교회'와

종말에 이루어질 '보이지 않는 교회'를 구분함으로서 시간과 역사 안에서는 누가 참 신자인지 알 수 없고 오직 역사의

종점에 가서 하나님 한 분만 아신다고 했다. 의인이면서도 죄인인 인간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 역시 참신자와 거짓

신자를 일도양단 식으로 분리할 수 없으며, 반드시 선악을 함께 품는 모호성을 피할 길이 없다고 보았다. "[교회

안에는]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뒤섞여 있다.… 그러므로 하늘의 시민들이 땅의 도시에 속한 무상한 일에

분주하게 빠져 있을지라도 실망하지 말라. 반면에 하늘의 것에 몰두해 있는 사람들을 즉시 칭찬하지도 말라.

왜냐하면 때로 멸망의 자식들이 모세의 보좌 위에 앉기도 하기 때문이다.… 땅에 것에 관심을 두는 분들은 마음을

들어 하늘을 향하라. 그리고 하늘의 말씀에 몰두한 분들은 마음을 땅으로 향해야만 한다"

(「Enarrationes in Psalmos」 51.6).  

어거스틴과의 논쟁 끝에 도나티스트들은 결국 이단으로 정죄되고, 호노리우스 황제의 칙령으로(AD 412년)

도나티스트 교회는 많이 와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북아프리카에서 도나티스트들과 카톨릭

교회와의 적대관계는 698년에 이슬람 세력이 북아프리카를 장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도나티스트가 왜 문제인가? 자신들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었다. 분명

교리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자신들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였기에 결국 이단으로 정죄되고 만다. 해방 후

한국교회가 특히 신사참배한 대부분의 목사들과 장로들이 고신 측을 도나티스트주의자라고 매도하였다. 하지만 고신

측은 신사참배를 하였던 아니하였던 상관없이 다함께 회개하자고 주장하였고, 고신측만 구원있다고 결코 주장한

바가 없다. 그러므로 고신 측을 도나티스트로 매도한 그들이 오히려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다시 밀하지만 고신 측은

결코 도나티스트주의자들이 아니다.

 재건파 쪽에서 고신을 타락한 교회와 타협하였다고 주장하였으니 오히려 재건파가 도나티스파에 더 가까웠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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