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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000년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주요 사건 열전 - 최초의 윤리신학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AD 210년 경)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교회 탄생 후 수십 년 동안 기독교 신자들은 대부분 구체적인 문제나 사건들에 관하여

저술했다. 이러한 모습은 사도 시대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 시대의 기독교

학자들을 가리켜 ‘사도 교부들(apostolic fathers)’이라

부른다. 교부들의 저술은 모두 한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이들 중 그 누구도 기독 교리

전체를 해석하고자 시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2세기 말에 나타난 마르시온과 영지주의자들의 도전은 또다른 반응을 요구하였다.

이들 이단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교리 체계를 마련하였으므로 교회 일반도 이에 대해 정통

신학을 체계적으로 수립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이단들의 이론 체계가 너무도 포괄적이고 거대하였으므로 기독교 교사들의 응답

역시 그 규모가 커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기독교 진리의 해석을 시도하는 저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그리고 오리겐 등의 작품들이

바로 그것이다.

1. 저자의 생애

2세기가 끝나는 무렵 교부들 중 위대한 인물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이다. 클레멘트는

헬라의 철학자였다. 그는 로마제국의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가 통치하는 시기

그리고 폴리캅, 저스틴, 그리고 이레니우스가 활약하고 있을 때에 태어났다. 그는 약 150년

아테네에 태어났다는 것 외에 어린시절에 대해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그는 순교자 저스틴과 같이 기독교로 회심한 사람이며 그 후 기독교신앙에 관한 진리를

탐구하는데 여생을 바쳤다. 그는 다른 곳에서 기독교 스승들에게 잇달아 배우고 연구한

끝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비로소 만족할 만한 스승 판타에누스를 만났다. 클레멘트는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게 되었고, 스승이 죽은 뒤에는 그 자리를이어받아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독교 교사로 활약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기독교계의 중심지로서 안디옥과 견줄 정도일 뿐만 아니라 학문의

도시였다. 이곳의 박물관, 혹은 뮤즈 신들의 신전에는 도서관이 붙어 있어 오늘날 대학들과

비슷하게 운영되고 있었고, 기독교 대학교와 같은 교리학교가 설립되었다. 클레멘트는

교부 저스틴과 이레니우스 이래 기독교 문화를 주도한 인물이었다.

로마제국의 황제 코모두스(180-192)와 세베루스 시기에 그는 「스트로마타」를 편집했다.

이 당시 그의나이는 40세 가량이었다. 클레멘트는202년 로마제국의 황제 세베루스의 통치

시기에 그곳에서 일어났던 핍박을 앞에 두고 알렉산드리아를 떠나면서 교리학교에서의

가르침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로마황제 카라칼라(211-217) 통치 동안 예루살렘에

거하였고, 안디옥을 여행하였다. 그러다가 약 220년 경 세상을 떠났다.

예루살렘의 감독 알렉산더는 클레멘트를 자신의 스승으로 여기면서 ‘거룩한 클레멘트’라고

불렀고, 알렉산드리아의 시릴은 그를 학문과 헬라어에 조예가 깊은 자라고 평했다. 그의

제자들은 오리겐, 예루살렘의 감독 알렉산더, 콤베피시우스(Combefisius), 부울(Bull),

그리고 히폴리투스 등이 있다.


2. 저서 및 사상

클레멘트가 일생의 대부분을 보낸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가장 지적 활동이 활발한

곳이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는 무역의 중심지로서 학자나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모험가들과 상인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나일강 어귀에 있는 이 도시는 혼합

절충주의의 유행을 따르고 있었다. 클레멘트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연구하고 가르쳤으므로

알렉산드리아 특유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클레멘트에 대하여 특징적인 것은, 한편으로

그는 ‘교회의 규칙을 결코 범해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을 갖고 스스로를 기독교 옹호자이며

해석가로 여겼고,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일반 기독교인들이 철저하게 싫어했던 ‘세속적’

학문과 문화에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목회자가 아니라 사상가요

연구자였다. 그가 학문을 탐구한 목적은 교회의 전통적 신앙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을 돕고, 이교도 지성인들에게 기독교가 절대로

불합리한 미신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클레멘트의 남아있는 작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셋이다. 하나는 「이교도들에게 주는

권면」(The Exhortation to the Heathen)이 있다. 이 책은 하나님의 로고스를 따르라고

요청하는 결론을 내리는, 이교 종교에 대한 비판서이다.

그 다음으로「교사 [또는 파에다고구스]」(The Instructor or Paedagogus)가 있다. 이 책은

젊은 기독교인을 위한 가르침을 담은 것으로, 그리스도를 기독교적 삶을 위한 규칙들을

주신 참된 교사로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그는「스트로마타 [또는 잡록]」(The Miscellanies or

Stromata) 이 있다. 이 책은 당대의 종교 문제와 신학 문제에 대한 자신의 사상을 모은

것이다. 이 책은 육신과 혼인에 대한 경시, 그리스 철학적 전승과 계시의 관계, 기독교인의

생활이 갖고 있는 목표와 성격과 같은 문제에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저스틴과 같이 클레멘트가 보기에 신적인 로고스는 언제나 모든 곳에서 인간의 스승이

되었다. ‘우리의 교사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며, 모든 인간의 인도자가 되시는

로고스이다.’ 그러므로 이런 저런방식으로 그리스의 철학적 전통 뒤에 있는것은 다름 아닌

이 교사의 영감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일의 원인이시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구약과

신약 같은 것의 원인이시며 따라서 철학과 같은 것의 원인이시다.’ 라고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유대인에게 율법이 주어졌듯이 헬라인에게는 철학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양자는 모두 당시 그리스도 속에서 계시된 궁극적 진리로 사람들을 이끄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옛날 선지자들이 히브리인들에 대해 담당했던 역할을 철학자들은 헬라인을

위해 담당한다는 말이다. 언뜻 보기엔 성경과 철학자들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는

듯하다. 그러나 클레멘트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 결국 철학자들이 깨달았던 진리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클레멘트는 자신을 성경 해석가로 간주하였으나, 그의 주석은 플라톤주의에 가까운 사상과

교리들을 성격 속에서 추출하곤 했다. 하나님은 불가해한 존재로서 우리는 단지 상징과

부정적인 용어로서만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 아니신가만

말할 수 있다.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 아니신가만 말할 수 있다.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관해서는 단지 인간의 용어로서 표현할 수 있는 그

이상의실재라고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바로 이 형언할 수 없는 존재께서 말씀 혹은 로고스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되셨다.

선지자들과 철학자들이 아는 모든 진리는 바로 이 말씀 혹은 로고스로부터 추출한 것이며,

이는 결국 예수님 속에서 성육하신 것이다. 이 점에서 클레멘트는 이미 저스틴이 지향했던

방향을 좇고 있다. 양자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저스틴이 이교도들에게 기독교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로고스의 교리를 사용했던 것에 반해, 클레멘트는 같은 교리를 이용하여

기독교인들에게 철학을 진리에 관하여 보다 개방적 태도를 취하도록 촉구했다는 점이다.

클레멘트는 기독교적 생활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터툴리안이 기독교적 생활을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으로 보았고, 영지주의자들은 그 생활이 단번의 각성에 있는 것으로

보았는데, 클레멘트는 기독교적 생활을 하나님을 닮는 데 이르는 점진적인 도덕적 지적

변모 과정으로 파악했다. 클레멘트가 보기에 하나님을 닮는 것은 이전의 이레네우스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일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그것의 존재 방식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적 이상은, 신앙에 지식을, 지식에 사랑을, 사랑에

유업을 더하는 ‘참된 영지주의자’의 이상이었다. 클레멘트는 이렇게 쓴다. ‘내가 보기에

이교에서 신앙으로 이르는 첫 번째 종류의 구원의 변화가 있고, 신앙에서 지식으로 이르는

두 번째 변화가 있다. 그리고 이 후자는 사랑으로 나아갈 때 즉시로 인식자와 인식 대상

사이에 서로 친밀한 관계를 수립하기 시작한다.’ 이는 자아가 계속 진보하면서 ‘실로 주께서

거하시는 데로 계속 나아가’ 거기서 ‘모든 변천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안전하고 영원히

있으며 거하는 빛’으로 남는다.


3. 평가

클레멘트는 기독교에 많은 영향을, 즉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동시에 끼쳤다. 밝은 면은

위에서 밝힌 부분들이라고 한다면, 어두운 면은 철학적 방법으로 진리를 해설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절충주의와 신플라톤주의라는 의미이다. 이런 사상들은 인간이

완전에 이를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사상이다. 이러한 면을 클레멘트는 그가 쓴  

작품에서 분명하게 보여준다. 첫 번째 작품「권고」에서 이교도들이 기독교를 수용하도록

권하는 글이지만 중요한 기독교 진리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두 번째 작품 「교사」는 새로운

신자들이나초신자들을 위한 글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교사로만 보는 것이다 보니

그리스도의 3중직의 부분이 매우 빈약하다. 더욱이 세 번째 작품인 「잡록」은 헌신된

신자들의 속성을 소개하고 있는데 도덕 부분에 너무 치중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도덕적 교사로 소개했던 것이다. 마치 공자나 불자와 훌륭한 사람으로 그리스도를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클리멘트는 기독교 도덕론이나 윤리학의 선구자라고 여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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