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Translation

커뮤니티

자유게시판

31-Samuel Forman Moore (세뮤얼 무어, 모삼열) 선교사


Samuel  Forman Moore (무어, 모삼열) 선교사-1892년 입국

모삼열선교사 사진 이미지 검색결과

서울 승동교회를 설립하여 천대받고 버림받은 백정들에게 희망의 복음을 전하였던 사무엘 무어 (Samuel F. Moore)

선교사 역시 맥코믹 신학교 출신이었다. 1860년 9월 15일, 일리노이주(Illinois) 그랜드 릿지(Grand Ridge)에서 출생한

무어 선교사가 몬타나(Montana) 대학을 졸업한 것은 29살 나던 1889년이었다. 곧 바로 맥코믹 신학교에 진학한 무어는

3년후인 1892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그 해 4월 시카고 노회 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미 안수를 받기 전 1891년

12월 7일 선교사로 임명받은 무어 선교사는 1892년 8월 16일 은둔의 나라로 향하는 배에 올랐고, 부인 로즈(E. Rose)와

함께 고향인 미국 일리노이 주를 떠나 1892년 9월 19일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곳 조선(한국)에서

1906년 12월 22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14년 간을 조선(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있어서 매우 선명하면서도 온화하고 관대한 성품으로 널리 알려진 무어선교사는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복음 안에서 하나라는 복음 본래의 사명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변함 없이 실천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누구도 모방할 수 없을 만큼 그의 태도는 한국의 하류 층의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었고 이와 같은

성품에 기초한 그의 리더십에 힘입어 그는 이 백성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교회 가운데 몇을 세웠다. 그는 자유자나 종이나

복음 안에서 하나라는 역사의 진실을 몸으로 실천하고, 조선(한국) 사회에 신분 타파를 정착시킨 주인공이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도움으로 좋은 어학교사를 만나 한글을 배웠으며, 한글로 전도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어학에 능통하였다.

 

무어선교사는 권서인 서상륜과 함께 백정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곤당골(을지로 입구, 현 롯데호텔)에 자리를 잡고 백정들을

상대로 전도를 하여 1893년 6월 16명이 모인 가운데 곤당골 교회를 설립하고 학교도 세웠다. 학생 중에 봉주리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백정인 아버지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어 선교사는 고종의 주치의요, 제중원 원장

에비슨 선교사의 진료를 받게 하여 박씨를 치료해 주었고 완쾌된 박씨는 큰 감명을 받아 곤당골 교회에 출석하고 세례를

받아 이름조차 없던 백정 박씨는 박성춘이라는 이름도 얻게 되었다. 여기에 전도에 자신을 얻었던 무어 선교사는

양반들에게도 전도하여 양반과 천민 구별 없이 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앙의 공동체를 형성해 나갔다. 무어의 의식화

교육을 받았던 박성춘은 무어 선교사와 협력하여 백정 선교에 힘을 쏟았다. 이 일로 곤당골 교회의 분위기가 신분 철폐

쪽으로 흘러가자 양반들의 입지가 좁아지고 양반들의 반발 또한 거세어 졌다. 양반들은 따로 나가 예배를 드리는 사태까지

벌어졌으나 “예수님 안에서는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없으며, 다 주님 안에서는 형제고 자매입니다.” 하며 저들의 행위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무어 선교사는 천민들이 모여 사는 마포 강변을 오르내리면서, 어부 생활을 하는 그 지역에도

전도를 하였다. 예수 안에서 신분이 철폐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천민들은 계속해서 모여들었고, 무어 선교사는 마포에서

배를 타고 광나루까지 다니면서 전도한 결과 16개의 교회를 세웠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마포구에 있는 동막교회와 서대문

구에 있는 대현 교회이다. 양반들이 따로 나가 예배를 드리던 홍문삿골 예배당이 뜻하지 않은 화재로 소실되자, 양반들이

눈물로 회개하며 다 곤당골 교회로 모여들었고 이렇게 하여 양반 천민이 예수 안에서 하나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렇게 되자 교회가 점점 부흥하고 교인들이 많아지자 무어 선교사는 1905년 에 인사동에 새 예배처소를 마련하게

되었는데 양반과 천민이 함께 승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면서 승동교회(勝洞敎會)라 이름을 지었다. 현재의

승동교회이다.


그러나 무어 선교사는 1906년 12월에 장티프스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묘비명은 “조선인을  사랑하였고 또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기를 원하였나이다”

조선에서는 무어 선교사가 최초의 민중목회자의 창시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무어 선교사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았던 백정들은 민중운동에 앞장선 무어 선교사의 정신을 이었다. 승동교회에 장로 선거를 할 때 백정 박성춘이 당선되자

양반들이 더 이상 천민들과 같이 다닐  수 없다 하면서 안국동에 안동교회를 설 립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계속』

박흥배 목사

안디옥 세계선교협의회 회장

 왈브릿지 열방교회 담임목사

revpark001@gmail.com

댓글목록

자유게시판

NO 제목 글쓴이 날짜
103 [고신뉴스 KNC] 에스라대 제5대 총장 정근두목사 선출 HesedKosin 09-09
102 38-2 William J. McKenzie (윌리엄 맥켄지) 선교사 ② Henry Park 06-06
101 38-1 William J. McKenzie (윌리엄 맥켄지) 선교사 ① Henry Park 05-31
100 37- Lewis B. Tate & Mattie S. Tate (루이스 테이트, 최의덕 崔義德, 메티 테이트,) 선교사 남매 Henry Park 05-25
99 36- William D. Reynolds(윌리엄 레이놀즈, 이눌서 李訥瑞) 선교사 Henry Park 05-16
98 35- William M. Junkins (윌리엄 전킨, 전위렴 全緯廉) 선교사 Henry Park 05-12
97 주 조선(한국) 선교사들 관련 사진들에 관하여.. Henry Park 05-03
96 34-3 구 조선, 구한말 미국 선교사 열전(남장로교 7인의 선발대) ③ Henry Park 05-02
95 34-2 구 조선, 구한말 미국 선교사 열전(남장로교 7인의 선발대) ② Henry Park 04-25
94 34-1 구 조선, 구한말 미국 선교사 열전(남장로교 7인의 선발대) ① Henry Park 04-18
93 33-2 Frederick S. Miller(프레드릭 밀러, 민노아 閔老雅) 선교사 ② Henry Park 04-09
92 33-1 Frederick S. Miller(프레드릭 밀러, 민노아 閔老雅) 선교사 ① Henry Park 04-03
91 32- William L. Swallen (윌리엄 스왈른, 소안론 蘇安論) 선교사 Henry Park 03-28
90 31-Samuel Forman Moore (세뮤얼 무어, 모삼열) 선교사 Henry Park 03-20
89 30- Oliver R. Avison(올리버 에비슨, 어비신 魚丕信) 선교사 Henry Park 03-13
88 29- Graham Lee (그래함 리, 이길함) 선교사 Henry Park 03-06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