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 Frederick S. Miller(프레드릭 밀러, 민노아 閔老雅) 선교사 ①
- 작성자 : Henry Park
- 20-04-03 17:17
Frederick S. Miller(프레드릭 밀러, 민노아 閔老雅) 선교사 ①1892년 입국
충북 사람들은 프레드릭 밀러 선교사(1866-1937, 한국명:민노아, 閔老雅)를 충북 선교의 아버지라 부른다. 1892년
11월 15일 부인 안나 라이네이크(Anna Reinecke)와 함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조선(한국)에서 45년간
봉직하는 동안 서울에서 9년 동안 활동하였고, 1902년부터 청주에서 37년간 활동하면서 경기남부와 중부권 복음화를
위해 그의 젊음과 온 생애를 바쳐 헌신하였다.
민노아 선교사가 내한하여 처음으로 맡은 일은 마포삼열 선교사가 맡고 있던 “예수교학당”(현 경신학교)을 물려받은
일이다. 그는 교명을 “민로아학당”으로 개칭하여 자신의 교육 방침대로 보통반과 특별반(실업반)의 새로운 학제를 만들어
실용교육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이때 민족지도자 안창호(安昌浩)선생 등 제자들을 길러냈다. 조사 김흥경과 함께 1895년
연동교회 설립의 기초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구체적인 선교행위가 없는 교육 선교를 지양하라는 선교본부의
지시에 따라 민노아 학당은 1897년 10월 문을 닫게 된다.
그 후 아직 장로교의 발길이 미치지 못한 경기 남부와 충청도를 중심으로 선교하기 시작한다. 당시 청주는 호남과 영남을
잇는 교통 중심지이어서 한강 이남에서 몇 째 안 가는 5일장이 열리고, 특별히 우시장이 유명하였다. 또한 기차역 조치원이
가까이 있어 접근이 편하고, 발전 가능성이 많은 지역으로 판단하였다. 1900년 조사 김흥경과 함께 청주시장에 답사와
전도를 위해 내려왔다가 놀라운 소식을 접한다. 오천보, 문성심, 오삼근 등이 죽산 둔병리교회 사경회에서 참석하여 예수를
믿고, 이들이 돌아와 자생적으로 교회를 세웠다는 말에 크게 고무된다. 그는 조사 이찬규를 보내 오천보의 집을 매입하여
세운 교회가 충북 최초의 교회인 신대교회이다. 이뿐 아니라 보은, 회인, 괴산 그리고 경상도 상주까지 교회 설립하는 일을
지도하였다.
민노아 선교사는 충북 사람들의 심성을 귀하게 보았다. 조용하고, 점잖을 뿐 아니라, 학식이 있고, 배움에 열의가 있는 것을
느끼고 청주 선교본부의 설립을 강청하여 1904년 가족과 함께 청주로 이거한다. 아직 선교비 지원이 되지 않았는데도
자비를 들여 무심천이 내려다보이고, 청주 시장거리와 우시장을 내려다보는 남쪽 탑동 언덕 산지 5만여 평을 사들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곳에 청주에서는 처음 보는 붉은 벽돌의 2층 양관을 건립하였다. 이것은 청주의 명물이 되었다.
그는 1936년 12월 정년 은퇴하고 필리핀과 중국 등지를 여행하고 돌아와 1937년 청주에서 별세하였다. 조선(한국)에서
선교한지 45년째 되던 해 그의 유언에 따라 청주에 묻혔다. 그의 아내와 두 아이의 무덤이 그의 여름 별장이었던 양화진에
묻혀 있음에도 자신은 청주를 떠나지 않았다. 그를 위한 기념일도 없고, 작은 흉상 하나 없으며, 기념관도 없고, 그저
초라하게 돌아다니는 사진 한 장, 꾸미지 않은 작은 기념비 하나가 고작인 사람이지만 그는 신앙의 거장이었다.
충남 홍성군 홍주성 서문 밖에 자리 잡은 홍성제일교회도1900년, 민노아 선교사에 의해 설립되었다. 서해안 지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이며, 지역 내 많은 교회를 육성한 어머니 교회이기도 하다.
『계속』
박흥배 목사
안디옥 세계선교협의회 회장
왈브릿지 열방교회 담임목사
revpark00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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