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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유해무 교수, 우리가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2)

  • 작성자 : HesedMoon
  • 조회 : 2,808
  • 16-11-26 13:50

고려파의 축출로 인한 한국장로교회의 첫 분열로 고려파 선배들은 교회개혁이라는 정당한 목표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사랑이 부족하고 정죄하는 자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신사참배에 적극 참여하고도 회개하지 않고 교권을 잡았던 이른바 지도자들과 그들이 장악한 노회와 총회의 교권주의적 오만의 결과이다. 신사 참배 반대자들이 시도한 당시의 교회 운동을 가리켜 교회를 나누는 분리주의 운동이라고 규정하는 평가에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동조해 왔거나 혹은 그런 말에는 무감각함을 보여 온 사실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렇지만 이후 승동측과의 합동과 환원의 과정에서 고신교회는 씻지 못할 잘못을 범하였다. 한 선교사와 미국 정통장로교회 선교부는 성급한 합동에도 반대하였지만, 성급한 환원에 반대하여 이후 합동측과 공식적인 관계를 유지하지만, 한 선교사는 개혁신학의 확장을 위하여 고신교회와도 협력한다. 그러나 환원 이후 협력 관계는 이전만큼 회복되지 못하였다.

 

박윤선 목사는 고신교회와 고신신학의 지평을 웨스트민스터신조와 장로교 전통으로부터 네덜란드 개혁신학으로 확장시켰다. 그는 1930년대 평양신학교 재학 시절에 칼빈주의 또는 개혁신학을 배우지 못했다고 증언한다. 그는 박형룡 박사의 추천으로 1934년에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가서 공부하면서 개혁신학을 접하였고, 1938-39년에 두 번째로 유학하였다. 이 공부를 통하여 네덜란드 자유대학교에 가서 공부하려는 의욕을 가졌다. 비록 화란 유학 기간은 6개월에 불과하였지만, 1930년대에 화란어를 공부하고 화란 신학자 바빙크를 공부하고 화란 주석을 읽고 강의하고 주석을 저술하였다. 그의 활동으로 한국교회는 독자적인 첫 주석가를 통하여 개혁신학을 접할 수 있었다. 박 목사가 고려신학교 초기부터 고려신학교에서 개혁신학을 성경 주해와 변증학, 신학 일반에서 가르쳤고 이후 고신교회 안에서 그의 제자들이 그의 경건회 설교를 전국교회로 가서 전하는 방식으로 개혁신학과 설교가 고신교회로 퍼져갔다. 그렇지만 그의 활동은 고려신학교 개교 이후 10년만에 중단되었다가 복귀하지만 19609월 승동측과 합동 직전에 그가 교장직 수행을 제지당하면서 종결된다.

 

박 목사는 당시 장로회총회의 교회정치 혼탁과 권력 투쟁을 비판하였다. 즉 제 15회 총회가 적절한 조사도 하지 않고 경남노회가 고려신학교와의 관계를 가지는 것을 막았다는 것이다. 교회회의도 실수를 범할 수 있으며, 신자의 양심의 자유를 따라 잘못된 결정에 항거할 수 있음을 칼빈과 여러 신조들을 인용하면서 옹호한다. 총회파가 마산 문창교회의 예배당을 차지하려고 세속 법정에 고소하자 고신교회에 속한 목사(송상석)도 맞대응하였다. 총회가 소송 가능성을 열어두자, 박 목사가 이것이 고려파 정신인 초기의 개혁과 회개 정신이 퇴색이라고 지적하고 남을 소외시키는 편협함도 비판하였다. 즉 고려파는 모든 한국교회를 회개케 하는 선택된 집단이기 때문에 소송에 휘말리면 고려파의 권위가 상실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그는 1957년 초에 자기의 가르침을 존중하지 않는 이들을 떠난다. 다시 복귀하나 주일성수문제로 19609월 고려신학교를 완전히 떠난다. 박 목사는 교회 내에 권력을 쥔 이들의 강요였다.

 

박 목사는 1948파수군창간부터 편집장으로서 1960년 합동까지 129호를 발간하였고, 많은 설교 요약과 200편이 넘는 소논문을 기고하였다. 주제는 다양하여 매호 권두언에 이어 성경 주해, 조직신학, 교리사, 현대신학 비평, 교회의 제문제 평가, 동양철학, 목회학, 비교종교학, 칼빈주의 문화관, 기독교와 국가 관계 등을 다루었다.

 

박 목사는 초기 고신교회의 신학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국 동란 당시에 피난지 부산에는 온갖 신비주의와 방언을 포함한 은사운동 그리고 이단이 창궐하였다. 한국교회가 전통적으로 사경회나 부흥회를 개최하지만 개혁교회의 특징인 성경교육을 교인들에게 체계적으로 제시하지 못하였다. 박 목사는 개혁신학에 기초하여 문선명의 통일교, 박태선의 전도관, 나운몽의 용문산 운동 등을 비판하면서 고신교회의 신앙을 굳건하게 확립하였다. 이후 고신교회는 한국의 어떤 교회보다 불건전한 집회나 은사운동과는 늘 거리를 두게 되었다.

 

박 목사는 WCC도 비판하면서 근본주의자인 맥킨타이어(Carl Curtis McIntire; 1906-2002)1948년 주도한 국제기독교연합회(The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를 지지한다. 맥킨타이어는 1934년 메첸의 요청으로 독립선교부를 창설한다. 박윤선 목사는 1954년에 제 2차 국제기독교연합회에 참석하고 페이스신학교(The Faith Seminary)로부터 한상동 목사와 함께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러나 맥킨타이어의 신학적 입장은 박 목사가 동의하기 어려우며, 특히 한국의 불건전한 은사 운동이 스코필드관주성경이나 전천년설의 영향을 받은 것을 고려하면 이런 관계는 그리 건설적이지 못하였다.

 

박 목사를 이어 이근삼 박사(1923-2007)가 고신교회 안에서 칼빈주의와 개혁신학을 계속 강의하고 발전시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이 교수는 칼빈주의와 개혁신학을 신봉하면서 이 용어가 그의 입술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장로교 신조인 웨스트민스터고백서와 요리문답을 해설하였고, 고려신학교와 고신교회가 장로교 전통 위에 서도록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칼빈주의 문화관에 입각한 기독교대학에 대한 열망은 누구보다 컸고, 현재의 고신대학교는 그를 떠나서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근삼 박사는 박윤선 목사에게 직접 배웠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멘토가 있다. 한 명동 목사이다. 한 목사는 고려신학교 초기에 살림을 맡았고, 광복동·감천·암남동으로 이어지는 교지(校地)와 교사(校舍) 매입과 건축을 책임졌다. 그는 1955년부터 1965년까지 고려신학교 예과에서 독립한, 이후 고신대학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칼빈학원을 맡아 교장과 교수로 사역하였다.

 

한 목사는 일본고베중앙신학교에서 유학하면서 미국남장로교 선교사였던 풀턴(Samuel P. Fulton, 1938)의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유학을 시작한 1935년부터 첫 두 해 동안은 칼빈주의를 싫어하였지만, 곧 칼빈주의를 신봉하기 시작하였다. 풀턴의 칼빈주의는 웨스트민스터신조에 기초한 장로교적 개혁신학 전통을 말한다. 그래서 고려신학교 설립취지서에 나오는 문화운동인 기독교대학 언급은 한명동 목사가 기여한 바라고 추정할 수 있다. 박윤선 목사가 기독교대학교에 대하여 언급하거나 어떤 열망을 갖고 있었다는 증언이나 기록은 없다. 만약 박 목사가 유일한 작성자라면, 그가 유학하였던 화란 자유대학교도 언급되었을 것이다.

 

박윤선, 한명동 목사가 말하는 칼빈주의와 개혁신학은 한 편으로는 장로교 전통이요 다른 편으로는 화란 전통이다. 이근삼 박사는 이 두 전통을 연결한다. 고신교회는 1969년에 웨스트민스터고백서와 대교리문답서를 채택한다. 이때는 화란개혁교회와 자매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그 교회의 요청으로 이것들을 채택하였다고 볼 수 있으니, 그때부터 화란교회와 그 개혁신학의 영향이 고신교회에 영향을 미친다. 더욱이 암남동 교사를 신축할 때 화란개혁교회가 건축비의 절반을 모금하였고, 고려신학교 출신 교수 요원들을 받아 교육시킴으로 화란개혁교회와 그 신학의 영향은 1970년대 이후부터 고신교회 안에서 더욱 뚜렷하였다.

 

그렇다면 화란개혁신학이 고신교회의 내면에까지 영향을 미쳤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형식적으로 화란교회를 따라 굳이 시편을 부르거나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를 가르치거나 설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요리문답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이런 전통을 따라 웨스트민스터소교리문답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전통이 그 전과 후에도 고신교회 안에 정착하지는 않았다. 한 동안 SFC가 이런 전통을 지킨 적은 있지만, 고신교회 안에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을 대하는 태도는 화란개혁교회의 그것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현 고신교회 안에서 신조에 있어서 개혁신학을 따르는 교회는 많지 않다.

 

이근삼 박사가 한명동 목사를 이어 기독교대학인 고신대학교에 미친 기여와 영향이 지대하지만, 그가 가진 기독교대학에 대한 관심은 칼빈주의 문화관에서 왔으며, 설립취지서에 나오는 대로 일반은총론에서 출발한다. 이 박사는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기독교교육의 기초와 출발점인 언약과 (유아)세례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기독교교육은 문화운동이기에 앞서 신자인 부모들의 언약적 책임이며, 부모들은 기독교교육을 실행하기 위하여 자발적인 교육위원회를 조직하고 재정을 책임지며, 신앙고백적으로 교사를 선발하여 그들에게 자녀 교육을 위임한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기독교교육을 위임 받은 교사 또는 교수는 신조에 서명하고 부모의 위임에 따라 교육하며, 교육과 제반 업무 전반에 대해서 부모에게 동의를 얻고 보고하고 결재를 받는다. 이 경우 교리문답은 교회와 학교와 가정에서 중요한 교육 교재가 될 것이며, 세 영역을 연결하는 좋은 고리 역할을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고신교회 안에서 칼빈주의와 개혁신학은 거론되고는 있지만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한국교회 안에서 1970년대부터 강하게 불었던 교회성장운동의 여파도 이런 분위기 형성에 기여하였다. 이 운동을 여러 면에서 평가할 수 있겠지만, 교회 성장과는 거리가 멀다는 평가를 받은 화란 개혁신학은 영향을 미치면서 동시에 경원시 당하기 시작하였다. 한국교회의 성장이 멈추고 교인의 수가 감소하고 있는 현재에서 보자면, 이 현상의 책임은 교회성장론자의 신학이나 입장에 있지 개혁신학이 교회 성장에 어떤 부정적 영향이라도 미쳤다는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 화란교회가 출산에 의한 수적 성장만 한다고 비판을 받던 시절을 돌아보면, 격세지감이 든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세계적으로도 저조한 출산율로 인하여 수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한국교회도 역시 급격한 교회 공동화를 피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 앞에 서있다. 언약을 가르치고 언약백성의 사명을 기독교교육과 문화적 사명으로 확장시켜 가르치지 못한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고신교회는 칼빈주의와 개혁신학을 신봉하는 독특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여느 교회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현재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고신대학교와 복음병원을 지닌 한국 유일의 교파라는 자부심도 따지고 보면 칼빈주의와 개혁신학과는 별로 연관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이제는 고신대학교 의과대학/복음병원과 다른 분야의 역사를 살펴서 개혁교회의 면모를 점검해야 할 때가 되었다.

  

3. 고신교회와 고신신학: 회개의 영성

 

칼빈주의와 개혁신학이 가히 구호에만 머문다는 사실의 저변에는 고신신학의 영성의 쇠약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고신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측면이 있다면 이 영성이지만, 이것은 논문의 형식으로 담기에는 애매하다는 이유로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박윤선 목사의 신학은 주남선/한상동 목사의 회개의 영성 위에 서있었다.

 

고신교회는 처음부터 회개운동에서 출발하였다. 19464월 마산 문창교회와 이약신 목사는 한상동 목사를 청하여 부흥회를 열고 회개하였다. 이런 회개운동은 박윤선 목사가 인도한 경건회에서 계속 불이 붙었다.

 

6.25 전쟁 직전인 19504월 말경 경건회에서 박윤선 목사는 요한복음 21:15-27절을 읽고 설교하였다. 설교 후 자원하여 기도할 것을 제안하니, 한 학생이 눈물로 회개하며 기도하였고, 이어서 다른 학생들이 기도하였다. 학생들이 한 사람씩 나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죄를 회개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수업을 중단하고 기도회가 계속되었다. 성령님의 역사로 기도회는 회개운동으로 눈물과 감격으로 충만하였다. 이 기도회는 고려고등성경학교로 번져갔고 급기야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전국교회로까지 파급되었다. 설립자이지만 건강과 거리 관계로 부산에 자주 오지 않았던 주남선 목사도 이 회개운동의 소식을 듣고 신학교롤 방문하여 회개 운동에 동참하였다.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초량교회에서 박형룡, 김치선, 박윤선 목사가 하루 세 번 집회를 인도하였다. 박윤선 목사는 한부선 선교사가 참배를 거부하고 당한 고난을 언급하다가 자신이 단 한 번이지만 신사를 참배한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회개하였다. 이런 집회는 울산과 온산에서도 열렸고 제주도에서도 한 주간 열려 인도하였다. 그는 교역자들의 이런 회개 이후에 서울 수복이 있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회개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노회 발회식 선언문(1952,10,16)의 초석이다. 당시 장로회남부총회는 경남노회에서 교권을 장악한 친일세력의 충동을 수용하여 고려신학교 지지자들에게 총회 회원권을 박탈하고 축출하였다. 지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우주 통일 원리를 따라 한국의 정치적 통일과 한국장로회 종파 단일성과 한국장로회 임시행정기관 단일화를 위하여 최후까지 합동을 노력하였으나, 진리 안에서 하나 되기에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을 통탄하였다. 자신들은 단일화운동을 회개운동과 신학사상에 치중하였으나, 교권주의로 인하여 좌절당하였음도 고한다. “성경에 신앙생활의 삼대요소를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참 회개가 없는 자에게 참 믿음이 있을 수 없고, 참 믿음이 없는 자에게 소망이 있을 수도 없고, 하늘에 소망을 두지 아니한 자에게 아버지의 사랑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 그러나 참 회개가 없는 자에게 십자가의 승리가 있을 없고, 참 회개가 없는 자에게 하늘의 소망이 있을 수 없고, 참 회개가 없는 자에게 아버지의 사랑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선언문은 회개를 이렇게 많이 언급하면서 한국교회에 회개가 없음을 한탄한다. 회개가 없는 곳에는 진리도 없으니, “우리의 선배 칼빈 선생께서도 그 시대의 암흑면을 깨치고 진리를 바르게 세우기 위하여 개혁주의(복음화)운동을 시작한 것이 곧 우리 장로교회파의 창시였습니다. 우리 대한 예수교 장로회는 칼빈 선생의 개혁주의로 이루어진 교파이니 만큼, 우리들은 이 개혁주의 진리노선을 떠나서는 장로파 교회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우리들의 신앙에 만족을 얻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선언문은 회개를 막무가내 요구하고 명령하지 않는다. 진리를 지키기 위하여 교회사에서 성도들은 순교의 피를 흘렸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일제의 탄압과 총칼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사수하기 위하여 옥중에서, 산과 굴에서 모진 생활 혹은 유린당한 신앙지조를 회복하기 위하여 통회의 눈물바다에 잠긴 자들이라는 삼인칭 표현으로 선언에 참여한 자신들을 표현하였다. 이처럼 고신교회는 그 태동부터 회개운동이었고 진리를 지키기 위한 개혁운동이었다.

  

4. 신학 연구와 교육 그리고 봉사

 

신학은 교회를 위한 학문이며, 교회 현장에서 나와 교회의 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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