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교사 열전] 12- John Heron(존 헤론) 선교사 편
- 작성자 : Henry Park
- 19-08-30 11:35
John W. Heron(헤론) 선교사 -1885년 입국
헤론 선교사와 그의 아내였던 해티
헤론 선교사는 미국 테네시(Tennessee) 주 메리빌대(Maryville Univ.)와 뉴욕 의대를 수석 졸업하여 의대 교수 초빙을
받았지만 거절하고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1885년에 한국에 온다. 그가 조선에 선교사로 오기로 결심한것은 조선
(한국 ) 기독교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이수정이 쓴 편지가 실린 선교 잡지를 읽고 크게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란다.
"미국 사람들이여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주시오! 조선 백성들은 문명을 모르고 어둠 속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헤론선교사는 병들어 죽어가는 가난한 나라에 가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며 미 북장로교를 찾아 선교사
파송을 부탁한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먼저 일본으로 가서 이수정에게 조선말을 배우고
풍속을 익힌 다음 1885년에 6월 21일 다른 몇 선교사들과 함께 제물포에 도착했다.
헤론선교사는 이미 먼저 조선에 온 의료 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이 갑신정변으로 치명상을 입은 민영익을
수술하여 살려냄으로 고종의 신임을 얻어 궁정 시의로 임명 받게되어 알렌선교사는 궁정 사람들만 치료하는 서양
병원 광헤원 설립을 허락받았으나 알렌선교사는 일반 백성들도 치료할 수 있도록 탄원하여 제중원이라는 이름으로
바꾼다 (1885년4월 26일). 비로소 일반 백성도 서양 의학의 혜택을 보게 되고 이로써 의료 선교의 길이 열리게 된다.
바로 이 시기에 헤론선교사는 제중원 제 2 대 원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헤론선교사는 동료들에게 따뜻하고 우정이 넘치는 형 같은 사람이었지만, 보수적인 엄격한 도덕주의자였다. 술과
담배를 일체 하지 않았고 파티를 싫어했다. 커피보다 진한 것은 마시지 않았다. 그래서 1888년 가을에 새로 온 파워
(Power) 의사가 술을 마시고 저녁에 여자들과 노는 것을 혐오했으며, 그의 사임을 당연시했다.
헤론선교사는 말이 적었다. 또한 알렌선교사나 언더우드선교사와 달리 뉴욕 선교부에 편지를 별로 보내지 않았고,
자신의 입장을 굳이 변호하거나 옹호하지 않았다. 다만 테네시에 있는 부모에게는 많은 편지를 보낸 효자였다. 그는
인간관계에서 호불호가 분명하여 친한 사이라도 잘못한 점은 직선적으로 지적하는 스타일이었다.
헤론선교사는 의사로서는 최고 수준의 명의였다. 1887년 제중원 원장 겸 고종의 주치의가 됐고 외국인들을
진료하면서 왕실이나 공사관들 모두가 만족했다. 다만 외국인들에 대한 진료가 증가하면서 제중원에서 한국인
환자들을 돌보는 시간이 줄었고 따라서 한국어 습득이 지체되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헤론선교사는 전도열이 강했고 전도를 위해 한국어도 어느 정도 익혔기 때문에, 제중원에서는 치료만 했지만
정동 사택에서는 점차 방문자들에게 전도하고 성경을 가르쳤다. 특히 죽기 직전 병상에서 그는 한국인 하인들을 불러
복음의 기본 진리를 전하고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일 것을 유언으로 남기기도 했다.
선교사 게일의 증언에 따르면, 1890년 헤론선교사는 극심한 이질에 걸려 고종이 내준 휴양처였던 남한산성에
요양을 간다.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그는 서울로 돌아갔지만, 얼마 되지 않아 16 마일 떨어진 곳에 한 여인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출발해 그 여인을 진료했다. 그 여인은 살아났다. 하지만, 헤론선교사는
이때 다시 병이 악화되어 결국, 34세 나이로 숨을 거둔다. 조선에 온지 6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때까지도 서울에는 변변한 외국인 묘지조차 없었다. 당시 선교사 공동체는 조선 정부에 그의 시신을 묻을 매장지를
마련해 줄 것을 요청했다. 늑장을 부리던 정부를 도저히 기다릴 수 없어 헤론선교사가 살던 집 뒤편에 무덤을 쓰기로
하고 땅을 파기로 했지만, 조선의 풍습 상 사대문 안에는 시신을 매장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벙커 선교사가 매장지를 물색하게 됐다. 그렇게 한강변에서 멀지 않은 서울 서대문 바깥 4마일 정도 떨어진 작은
언덕, 양화진에 선교사 헤론을 묻을 수 있었다.
헤론선교사가 한국 선교에 공헌한 점은 여덟 가지 정도로 평가할 수 있겠다.
첫째, 제중원의 두 번째 원장(1885∼1886)으로서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면서 개신교 선교 사업의 기초를 놓았다.
둘째, 구리개 (을지로의 옛 지명) 제중원의 2대 원장 겸 고종의 주치의로서 제중원 진료를 본 궤도에 올리고 근대 의학
교육을 시작했다.
셋째, 의료 사업을 통해 넓은 의미의 선교, 곧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선교를 실천했다.
넷째, 1887년 성서번역위원회가 조직될 때 번역위원으로 성서번역에 참여했다.
다섯째, 1889년 10월 선교회 공회의가 조직될 때 회장으로 수고했다.
여섯째, 1890년 6월 대한성교서회(大韓聖敎書會, 대한기독교서회 전신)를 조직하고 전도책자 번역과 출판에
기여했다.
일곱째, 정동 사택에서 한국인들을 전도했다.
마지막으로 1890년 그의 죽음을 계기로 양화진에 외국인과 선교사들을 위한 묘지가 마련되었다. 그의 시신 조차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5년의 짧은 선교사 생활이었지만 헤론선교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과 성경을 가르치고, 병자를 고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하고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섬기는 종으로 살았다. 당시 조선은 불결하고 위생 관념도 없어 전염병이
철 따라 돌았는데 헤론은 밤낮으로 환자 치료에 전력을 다하며 복음을 전하고 밤에는 성경번역으로 과로가 쌓여
결국 이질에 걸려 33세의 젊은 나이로 소천하게 되었다. 헤론선교사는 그의 병상을 지키던 아내와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 나의 사역은 참으로 보잘 것 없었지만 모두가 주님을 위한 것이었다"고 고백하였다. 그의 묘비명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고 쓰여 있다.
헤론선교사의 아내 해티는 33세의 미망인으로 평소 헤론선교사와 가까웠던 30세의 총각이었던 게일 선교사와
1892년 재혼하였다.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고 헤론선교사와의 사이에 딸만 둘이 있었다. 해티는 1907년 두 딸과
한국을 떠났다가 스위스에서 다시 돌아와서 1908년 결핵으로 서울에서 소천하여전 남편 헤론이 묻혀있는 양화진에
묻혔다.
박흥배 목사
안디옥 세계선교협의회 회장
왈브릿지 열방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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