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역사 아카이브] 39. 이근삼 박사의 인재양성의 열정과 헌신
- 작성자 : 나삼진
- 22-08-23 22:53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39. 이근삼 박사의 인재 양성의 열정과 헌신
오늘날 미국이나 유럽으로 유학을 가는 신학도들은 교회나 기관의 장학금을 받아 떠나는 경우가 많다. 고려신학교 2세대 교수들은 미국교회이나 유럽교회의 지원으로 장학금으로 공부하였는데, 나라가 가난하여 출국 때에 100달러만 바꾸어 갈 수 있어 고학을 하며 공부해야 했다. 한국전쟁 후 이근삼은 부산에서 배편으로 일본 시모노세끼를 거쳐 샌프란시스코로, 다시 대륙 횡단 철도로 미시간 주를 거쳐 필라델피아에 도착해 공부했고, 박사과정에 입학했을 때는 배편으로 대서양을 건너 로테르담으로 가 네덜란드 자유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학위를 받은 후 다시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을 거쳐 귀국했다. 전설같은 이야기이다.
1970년대까지도 교회들이 유학생을 지원할 형편이 되지 않았고, 유학의 길과 기회도 많지 않아서 고려신학대학도 교수진 양성에 어려움이 많았다. 유학생을 위한 장학금도 한계가 있어서 지망하던 모두가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1980년대 초까지도 석사학위를 받고 교수로 임용되었는데, 김성수, 강용원, 이환봉, 이상규, 안민 등이 석사 학위를 받고 고신대학에 부임해 3년 정도 가르친 후 대학의 지원 아래 유학의 기회를 얻어 학자로 평생 봉사를 했다.
이근삼 교수는 고려신학교-고려신학대학-고신대학-고신대학교 발전과정에 중대한 역할을 했지만, 이를 위한 인재 양성에도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미국과 네덜란드 유학중에, 또 교수로 부임한 후에 개혁주의교회들이 모이는 국제회의에 참석하면서 여러 기독교대학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고, 학생들을 추천하고 장학금을 받아 유학의 길을 열어주어 교단의 인재 양성에 특별한 역할을 했다.
먼저, 네덜란드 자유대학교에서 한국인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네덜란드개혁교회와 관계를 맺고 유학생들을 추천해 공부하게 했다. 그는 자유대학교의 신학적 경향을 우려하여 네덜란드자유개혁파교회의 깜뻔 신학교와 교류의 길을 텄다. 이후 허순길, 양승달, 박성복, 안영복, 유해무, 변종길 등이 유학을 마치고 고신대학과 고려신학대학원의 교수로 봉사했다. 그러한 교류로 한상동 목사가 1972년 깜뻔신학교의 초청으로 네덜란드를 방문하면서 송도 본관 건축 지원을 요청해 송도본관 건축은 국내교회의 헌금과 이들의 헌금으로 1974년 기공, 이듬해 8월에 준공했다. 또 1980년대에 고재수, 박도호 교수가 선교사로 내한해 네덜란드교회가 생활비를 지불하면서 10년 동안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쳐 신학대학원의 수준을 높였다.
또한, 그는 미국 리폼드신학교와 자매관계를 맺고 유학생을 보내었다. 학회에서 만난 인연으로 그는 1976년 휫틀로그 총장을 초청하여 고려신학대학에서 신학강좌를 열었고, 이후 교류를 확대하면서 유학생들을 보내 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게 했다. 최덕성, 한기원, 고영희, 현유광, 임영효, 이병수 등이 이곳에서 석사나 박사 과정을 했다.
셋째, 그는 남아공화국 포쳅스트룸대학교와 자매관계를 맺고 유학생들이 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게 길을 열었다. 그는 남아공화국 포쳅스트룸대학교에서 개최된 제2회 국제기독교대학협의회(1975)에 참가하여 포쳅스트룸대학교와 관계가 형성되었다. 남아공화국은 625 때 파병 이후 우리나라와 우호관계를 이루었고 1976년 바이스 교수가 내한하여 특강을 가진 바 있었다. 그러나 남아공화국의 아파르헤이트 인종차별정책으로 UN제재가 있었고, 1978년 모든 관계가 단절되었지만, 그 기간과 이후에 김용섭, 정근두, 이승미, 김성수, 황창기, 한정건, 이환봉, 이복수, 신득일 등이 포쳅스트룸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교수나 목회자가 되었다.
넷째, 그는 고신대학장 재임시 총회교육위원장으로 6년간 재직하며 총회교육을 이끌었고, 필자와 박흥철 목사의 유학의 길을 열어주어 교단교육의 선진화에 기여했다. 총회교육원에서는 이 전통을 따라 연구원들이 3년 근무 후 국내의 교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 과정을 할 수 있도록 장학금과 시간을 배려하였고, 교단교육이 한국교회 교육을 선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이근삼 교수는 고신대와 신대원, 총회교육원에서 여러 인재들을 양성하였다.
어떤 학자의 지적과 같이 고신교회가 외교적인 관계를 맺은 교단들이 작고 재정지원에 한계가 있었지만, 미국교회로부터 재정적인 큰 지원을 받지 않았던 것이 고신교회 스스로 신학교와 병원 등 기관들을 세우는 자생력을 갖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근삼 교수는 학장시절 미문화원 방화사건에 학생들이 관여한 책임을 지고 학장직에서 물러나 한 해 동안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내었다. 그의 생신을 맞아 미국 교포교회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이 고신인 모임을 가졌고, 이것이 재미한인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조직(1995)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안식년 후 고신대학에 복귀해 가르쳤고, 1991년에 다시 학장에 선임되었는데, 그가 정부 교육정책의 변화로 1993년 고신대학교로 개칭하면서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1994년 2월 총장에서 퇴임한 후 미국으로 이주해 동부에서 고려신학대학원 원장으로 가르치다가 한인사회의 중심인 서부지역으로 이주, 지금의 Evangelia University를 설립하고, 에나하임 캠퍼스를 마련해 재미총회 신학교육의 기초를 놓았다.
2007년 향년 84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그는 고신교단에서 인재 양성의 큰 인물이었다. 그가 미국에서 EU를 운영하면서 교회를 방문해 설교하고 받은 사례까지 전부 학교 재정에 입금시켰는데, 이는 스승 한부선 선교사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고려신학교의 인재 양성은 초기부터 신학적 하나의 흐름을 가지고 있었다. 설립기와 1950년대에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 1960년대부터 네덜란드 깜뻔신학교, 1970년대 리폼드신학교, 1980년대 남아공 포쳅스트룸대학교에서 연구하고 학위를 받고 귀국해 교수로 가르쳤다. 1990년대 이후에는 교수들의 신학교육의 배경이 다양화되면서 학문의 다양성에 진전을 이루었지만, 신학적 통일성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근삼 박사의 인재양성에 대한 열정과 헌신으로 고신교회의 중기 이후의 인적 자산이 크게 풍성해졌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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