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역사 아카이브] 43. 미 문화원 방화 사건과 대학 민주화 운동
- 작성자 : 나삼진
- 22-09-29 00:01
다큐 고신역사 70년 역사 산책
43. 미 문화원 방화 사건과 대학 민주화 운동
고려신학교가 1946년에 설립되었지만 오랫동안 신학교로, 대학 인가 후에도 한동안 신학과만 있는 특수대학이었기 때문에 부산의 대학가에서도 주목받지 못하였다. 신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봉사하기를 기도하며 공부하였다. 개교 당시 예과 2년, 본과 3년 과정으로 시작하였지만, 예상되는 시대의 발전을 고려할 때 예과 2년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겨 1955년 한명동 목사를 원장으로 칼빈학원을 시작하였고, 철저한 수업과 학생 관리로 허순길, 김의환, 유환준 등 유수한 목회자와 신학자, 선교사들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감천 부지가 중앙대 설립자 임영신과의 분규로 1964년 고신대학(고려신학교 대학부)으로 복귀해야 했다. 이러한 노력이 고신대학교의 시작이라고 하겠다.
고려신학교 대학부는 대학원 진학과 유학을 고려할 때 당시 문교부의 인가를 필요로 하여 1970년에 고려신학대학 인가를 받았고, 기독교교육과(1977), 종교음악과(1978) 순으로 증과가 이루어졌고, 의예과(1981)가 신설되면서 고신대학으로 개칭하였고, 여러 학과들이 개설되었다. 고신대학이 전국적인 이름을 얻은 것은 역설적이게도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 때문이었다.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은 한국 학생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반미운동의 발화점이었다. 1982년 3월 18일 부산 중구 대청동 국제시장 부근에 위치한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은 고신대학 학생들, 곧 신학과 4학년 문부식, 기독교교육학과 3학년 김은숙, 의예과 2학년 유승렬, 장원식, 이미옥 등 고신대 학생 5명이 연루되었다. 이 방화사건의 본질은 광주민주화운동(1981)에 200명 이상의 시민이 희생되었는데, 전두환 군부의 개입과 민간인 학살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묵인한 미국의 책임이 있음을 지적하고, 이를 항의하는 차원이었다. 화재는 2시간만에 진화되었지만 뜻하지 않게 희생자가 발생,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동아대 학생 1명이 죽고 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더구나 제기된 이슈는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였고, 정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시절이라, 정권의 의도에 따라 언론들이 연일 앞다투어 보도하면서 두 달 동안 전국적인 이슈가 되었고, 고신대학이 알려졌다. 이들 학생들 중 주모자였던 문부식과 김은숙은 두 주간의 도피 끝에 원주 가톨릭 원주교육원에서 체포되었고, 이 사건으로 정권에서 대학 폐쇄까지 언급하는 등 급박하게 돌아갔다.
대학에서 누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었기 때문에 이근삼 학장이 “금번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에 본 대학에 적을 둔 몇몇 학생들이 관련된 것에 대해 국민 여러분과 교계에 깊이 사과를 드립니다. 특히 이번 사건으로 희생된 학생의 가족에게 애도를 표하며 화상을 입은 여러분의 조속한 쾌유를 빕니다. 이번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미국 문화원과 사건 해결에 수고하신 당국에 죄송한 마음을 금치 못하는 바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하여 학생지도에 더욱 전력할 것을 약속하는 바입니다.”라는 사과문을 발표하고, 3월 31일에 회집된 긴급이사회에 사표를 제출, 수리되었다. 학장자리에서 물러난 이근삼 박사는 한 해 동안 미국에 체류하며 낭인 생활을 해야 했다.
학교법인 이사회와 고신대학에서는 학장이 사면하고, 교단적으로는 총회장 역시 사과문을 발표하는 선에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교육부 측과 양해가 되었다. 총회장 최일영 목사와 학교법인 이사장 박창환 목사도 “이번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에 본 교단 소속인 고신대학에 적을 둔 몇몇 학생들이 관련된 것에 대해 국민 여러분과 교계에 깊이 사과를 드립니다. 특히 이번 사건으로 희생된 학생의 가족에게 삼가 조의를 표하며, 화상을 입은 형제의 조속한 쾌유를 빕니다. 이번 사건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미국문화원에 사과하며, 사건 해결에 수고하신 당국에 죄송함을 금치 못하는 바입니다. 본 교단은 이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계에 교묘히 침투하여 국가와 사회를 변란시키려는 불순한 세력과 복음전도의 길을 막는 적그리스도의 계교를 경계하고 대응하는 일에 더욱 힘쓰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관대한 용서와 교유 여러분의 기도와 성원을 거듭 소원하는 바입니다.”는 사과문을 발표하였다. 대학 학도호국단도 마찬가지였다.
지금(2022) 와서 생각하면, 이 사건은 고신교회가 기독교대학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출발한 것에 큰 시험을 제공하였고, 교회나 대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도 다시 살펴볼 문제가 있었다. 더구나 총회장의 사과는 교회가 사회에 대해 사과하는 것이어서 그 의미에 대한 신학적인 논의가 필요했지만, 고신교회나 대학에서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1980년대 중반에 들면서 한국 사회에서 대학민주화운동이 극에 달했던 시기여서 고신대학도 그 영향을 벗어날 수 없었다. 대학에 의예과가 신설되고 의학부가 생긴 후 매년 104명씩 학생들이 늘어 몇 해 만에 포화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교육환경에 의대 학생들의 불만도 컸다. 학생들의 자치활동도 이전 송도 캠퍼스와는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의과대학 해오라비 축전에서는 고사를 지내는 등 전국교회와 고려신학교 동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신학대학원과 동문들에게 민감하게 비추어졌고, 신학대학원의 학습환경이 점처 어려워지면서 신학대학원 천안 이전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한국 대학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기도 했지만, 고신대학으로서는 준비되지 못한 가운데 의과대학이 설치되었고, 기독교 대학을 설립 운영함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없어 원칙을 가지고 대처하지 못한 점도 있었다. 신학대학원으로서는 40년 동안 신학교 분위기가 위축되면서 날로 열악해지는 학교 환경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송도캠퍼스의 협소함으로 교단에서는 1989년 부평캠퍼스에서 한 학기 수업을 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는 학기마다 학생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수업이 학기말에 정상적으로 마쳐지는 경우가 드물었다. 대학가에서 보았던 ‘◯◯◯ 물러가라’ 등의 현수막과 대자보가 고신대 캠퍼스에도 벽면을 가득메웠고, 캠퍼스가 평안한 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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