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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역사 이야기

[고신역사 아카이브] 44. 전담 총무 도입과 총회 회관 건축, 총회 본부의 강화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44. 전담 총무 도입과 총회 회관 건축, 총회 본부의 강화

고신교회는 1980년대 후반부터 총회 사역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총회교육위원회가 간사 제도를 도입하면서 교사통신대학(1986), 성경통신대학(1989), 생명의 양식 교육과정의 개편(1986-89) 등으로 재정적인 자립기반이 갖추었고, 교회지원 간사 제도 도입 3년만에 6명의 간사를 전담간사제도로 전환하였다. 또 한국교회에 일기 시작한 선교운동으로 선교사 파송이 증가하면서 총회선교부가 자리를 잡았다. 고신총회에서는 행정적으로 전담 총무 제도 도입과 ‘기독교보’ 복간으로 유급직원이 급격히 늘어났다. SFC도 초대 간사로 김만우 목사가 사역을 시작한지 10여년이 흐르면서 전담간사 제도가 되었고, 이후 간사들의 헌신과 후원자들의 협력으로 유급간사가 크게 증가하였다.

이러한 변화 끝에 1980년대 중반 이후 나타난 고신교단 행정의 변화는 총회 전담총무제 도입, ‘기독교보’ 복간(1989), 총회회관 건축(1993), 총회 선교의 확장, 고신언론사 출범, 총회교육원의 전문화, SFC간사 제도의 정착, 그리고 은급재단의 설립과 정착 등이었다.

경남(법통)노회에서 출발한 고신교회는 부산경남에 교단 중심이 있었기 때문에 중앙집권적인 한국사회에서 서울에 사무실을 두어 대정부와의 관계를 갖는 것이 필요하였다. 이 일에 민영완 목사와 최해일 목사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민영완 목사는 1976년 총회장을 마치면서 총무의 필요성을 건의해 초대 총무로 7년 동안 봉사하였고, 제2대 최해일 목사는 이를 이어 9년을 봉사하였다. 그는 뛰어난 설교에다 교단 안에서나 한국교회에서 두루 신망이 있어 총무로 적임자였다. 그는 서울남부교회를 개척하며 총무로 사역하였고, 교회가 성장하면서 목회에 대한 갈망으로 교회로 돌아갔다. 그는 1980년대 중반부터는 총회사무실 업무가 많아졌고, 오랜 총무의 경험으로 제38회(1988) 총회에 ‘총무의 종합적인 의견’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최해일 목사가 교회로 돌아가면서 제40회 총회에서는 전담총무 제도를 도입하였고, 심군식 목사가 초대 상임 총무가 되었다. 그 시기에 교단 내 정치 상황이 이른바 돼지파와 부곡파가 존재했기 때문에, 이 계파에 조정 역할을 할 수 있는 이로서, 또 기독교보 복간과 총회회관 건축을 구상하였기 때문에, 원만한 인격에다 문인이었던 심군식 목사가 적격이었다. 그는 문인으로서 오랫동안 교단 문서운동에 기여하였는데, 고신교회 설립자였던 한상동, 주남선 목사를 비롯하여 신앙인물들의 전기를 집필했던 전기작가이기도 했다.

심군식 목사는 온유한 성품에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목사였기 때문에 교단 총무로서 ‘기독교보’ 편집국장을 겸해 사역하면서 왕성한 필력을 발휘해 교단 역사와 정신을 세우는 일에 크게 공을 세웠고, 총무 사역이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당시 고신교회는 총회분담금이 많지 않았고, 총회가 재정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전담총무 제도의 도입을 준비하면서 재원 조달을 위해 제38회 총회에서 교재 출판 일을 총무 관할로 하는 결의를 받아내었다. 총무 최해일 목사는 교단발전연구위원회 보고를 통해 총회교육위원회의 출판권을 이관해 갔다. 총회교육위원회가 조성한 출판 수익으로 재정이 확보되어, 맨손으로 시작했던 ‘기독교보’ 간행에 도움을 주었고, ‘기독교보’가 총회회관 건축을 집중적으로 홍보하면서 회관 건축이 가능하게 되었다.

제40회 총회에서는 총회회관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총회회관 건축을 결의, 위원을 두었다. 총회회관을 건축을 준비하면서 신세훈 장로가 지금의 반포동 부지를 기부하고, 추가 부지를 매입해 건축을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오랜 자매관계를 갖고 있던 정통장로교회(OPC) 선교부가 연희동 가옥을 매각하여 한부선 기념 선교센터를 함께 건축하기로 하였다. 이는 부산경남을 기반으로 한 지방교단으로서 정부는 물론 타교단들과 교류하고 협력하는 일에 꼭 필요한 과제였다. 당시 총회적인 재정이 없어 총회 결의로 교회들이 헌금에 동참하였고, 많은 목회자들이 한 달 사례를 헌금하기도 했다. 1993년 총회를 기해 총회회관이 준공되었고, 이후 영남중심교단으로 알려진 고신교회의 위상이 한국교계에서 크게 개선, 강화되었다.

고신교회는 설립 초기부터 한국장로교회의 소수파로서 교회쇄신운동의 정신과 외침을 총회파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초기부터 ‘파수군’을 발행하여 교회쇄신을 외치는 것은 물론 고신교회 내적으로 신앙과 정신의 일치를 이루게 되었다. 교단 문서운동은 1948년 창간한 ‘파수군’에 이어, ‘개혁주의’, ‘고신대학보’, ‘개혁신앙’이 그러한 임무를 담당하던 중 1980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정책으로 폐간되었다. 이후 교단지 복간운동을 전개해 1981년 ‘월간고신’이 발행되기 시작했고, 총회회관 건축을 준비하면서 1989년 총회를 기해 ‘기독교보’가 복간되었다.

1994년 전국장로회연합회에서 ‘경영전문인’ 주장이 나왔고, 1994년 제44회 총회에서 ‘기독교보’와 ‘월간고신’을 통합하는 결의를 하였다. 서창수 목사가 ‘월간고신’ 발행과 운영을 위해 많은 수고를 했지만, 총회 지도자들과의 관계의 문제로 제45회 총회에서 총회장과 학교법인 이사장의 탄핵을 받았고, 고신언론사로 통합되면서 얼마 후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교단 문서운동에 17년 동안 헌신한 그가 타의에 의해 물러난 것은 무척이나 아쉬운 일이었다.

2천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교회 선교 분위기에 따라 고신교회에서도 선교에 동참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선교에 관심을 가졌고 해마다 선교사들이 급증하였는데, 1992년 재미총회에서 시작된 세계선교대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였다. 학원복음화운동의 열기로 SFC간사들도 모금에 의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지만, 크게 증가하였다. 대학생대회는 물론 매년 모이던 동기수양회를 1983년부터 3년마다 개최하는 SFC하기수양회로 바뀌었는데 참가자들이 급증하였고, 만 명을 넘게 되면서 몇 회에 걸쳐 개최하는 해도 있었다.

또 43회 총회의 결의로 1994년 1월에 시작된 총회 은급재단도 안정적으로 발전해 왔다. 현재(2022년) 기준 2,493명이 가입되어 있고, 910억 원의 기금을 운용하고 있는데, 한국교회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예장통합교단에 이어 2위 규모이다. 고신교단 은급재단은 안정적인 운용으로 교단 은급제도의 모범적인 사례가 되고 있다. 이는 향후 목회자들의 안정적인 목회를 뒷받침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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