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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역사 이야기

[고신역사 아카이브] 46. 교회쇄신운동에서 평신도들의 항거와 평신도운동의 계보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46. 교회쇄신운동에서 평신도들의 항거와 평신도운동의 계보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투옥된 그리스도인들이 6년 동안 투옥생활을 했고, 해방후 교회쇄신운동을 전개하며 평신도들과 여성도들의 적극적인 협력이 있었다. 해방 후 산정현교회에 머물며 한 달 동안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기도한 후 출옥성도들이 교회쇄신방안을 발표했을 때, 목회자들 가운데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협력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신사참배 결의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던 홍택기 목사는 이북에서 박형룡 박사의 발표에 저항하였고, 경남지방에서 김길창 목사는 신사참배 문제를 양심의 문제로 생각하고, 애써 외면하였다.

그들을 따르는 목회자들은 경남노회가 공적으로 결의하여 자숙하고 참회하는 집회에 참여하지 않았고, 오히려 교회쇄신운동의 방해하였으며, 이들은 중앙 교권주의자들과 연계하여 노회를 분열하고, 경남(법통)노회가 총회에서 단절되는 일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당국에 협조하면서 목회했던 이들은 교회의 외면으로 스스로 사면한 이들도 있었는데, 초량교회 김만일 목사 같은 이가 그러하였다.

교회쇄신운동이 경남지역 교회에서 뿌리내린 것은 교권에 대한 평신도들의 지속적인 항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주기철, 주남선, 한상동, 손양원, 최상림, 이현속 등 존경받던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주역들이 경남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평신도들 가운데는 손양원 목사의 아버지 칠원교회 손종일 장로나 훗날 박손혁, 치덕, 정덕 삼형제 목사를 배출한 밀양마산교회 박수민 장로 같은 이들은 신사참배 강요를 반대하였고, 자녀들을 신사참배에 동참시키지 않으려고 학교를 그만두게 했을 정도였다. 이현속 장로는 투옥되었다가 순교를 당하기도 했다.

해방 후 이들 평신도들은 경남노회 재건을 위해 노회장으로 추대되었던 주남선 목사가 ‘절회주간’ 행사가 1945년 12월 추운 겨울에 태종대에 있었는데, 이것이 교회쇄신운동의 사실상의 출발이었다. 이 행사에 출옥성도들의 신앙을 지지하던 많은 평신도들이 함께했고, 이들은 교회쇄신운동의 전도사들이 되었다. 교회쇄신운동은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는데, 많은 평신도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 다짐하고, 해방 후 새로운 나라에서 바른 신앙을 지켜나갈 것을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그 선봉에 섰던 이들이 청년들이 면려청년연합회 경남연합회였는데, 회원들은 교회쇄신운동을 이끌던 출옥성도들의 적극적인 지지자들이었다.

고신교회 출범을 전후한 역사를 아는 이들은 교회쇄신운동을 주도한 문서로 ‘파수군’을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파수군’보다 1년 이상 앞서 발행한 ‘면려청년’이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사역에 앞장선 이들이 회장 권성문, 총무 정홍석이었는데, 이들은 훗날 고려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가 되었다. 면려청년 경남연합회는 1947년 11월 15일 ‘면려청년’을 창간하며 각 교회의 유대를 강화했고, 청년대회를 세 차례 이상 주최하여 교회쇄신운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또 ‘면려 청년’에는 박윤선 교장이나 교회쇄신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의 글을 실었고, 총회파의 불공정한 향정을 고발하였으며, 각 교회에서 갸최되는 부흥회 기사 등을 보도하며 많은 평신도들이 이웃교회에서 열리는 집회에 동참할 수 있게 했다.

교회쇄신운동은 이렇게 청년들과 평신도가 앞장섰기 때문에 운동이 자리잡을 수 있었다. 1950년대에는 여성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부흥회를 인도하였는데, 명향식, 우태숙, 박인순, 박복달 등은 부흥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들이었고, 출옥성도 조수옥, 이약신 목사의 부인 이옥경 등은 고아원 등의 사역으로 고신교회의 사회봉사를 이끌었던 인물들이었다.

교회쇄신운동에서 평신도들의 항거의 전통은 고신교회에서 면면히 이어져, 한국교회에서 고신교회 평신도운동이 강하다는 인식을 하는 편이다. 그 앞자리에 선 김경래 장로는 경향신문 편집국장 출신으로,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사무국장으로서 한경직 목사를 도와 한국기독교100주년 기념사업을 도왔고, 외국인 묘지를 정비해 양화진 선교사 묘원이 되었다.

손봉호, 이만열 두 교수가 그 뒤를 이어 중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 그들은 청소년과 대학 시절 고신교회 안에서 SFC운동으로 성장하였던 인물들이다. 손봉호 교수는 서울대 재학시절에 새생활운동에 함께 했고,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유학해 신학을 공부하고, 네덜란드 자유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네덜란드에서 아브라함 카이퍼나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주의 신학과 학문에 심취하며 그들의 미쳤던 사회적 영향력을 보았고, 귀국해 한국외국어대학 화란어과에서 가르치다가 서울대 교수로 안착하면서 사회적인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었다. 손 교수는 어려운 철학을 쉽게 가르치는 능력을 가졌고, 사회적 이수가 있을 방송에서 한국 사회의 갈 길을 제시하며 큰 공감을 얻어왔다.

이만열 교수는 전두환 정부 때 해직교수 시절, 합동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프린스톤신학대학원 객원교수 시절 한국교회사 관계 자료들을 다수 수집해 연구하였고, 외국인 근로자 사역에도 앞장섰다. 그는 훗날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를 설립하여 기독교사 연구에 크게 기여하였고, 국사편찬위원장으로도 봉사했다. 두 교수는 1970년대 초 대학생대회에 강사로 매해 봉사하였고, 그들은 찬조금을 준비해와서 강의를 하며 학생들과 교제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였다. 그들이 이끈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한국교회 기독교 사회운동의 역할을 하였다.

고신언론사 사장을 지냈던 정금철 장로는 정치와 교계의 언저리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였고,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사무총장으로 봉사한 이들도 있었다. 김창성 장로는 한국기독실업인회(CMBC) 사무국장으로서 각 교단 평신도 리더들을 엮어 함께 일하였고, 이우준 장로는 국제기드온협회 사무국장으로서 성경보급운동에 앞장서 봉사하였다.

교세가 크지 않은 고신교회에서 이렇게 평신도들이 괄목할만한 사역을 한 것은 이들이 성장기에 SFC를 통해 학생시절부터 강한 훈련의 기회를 가졌고, 자발적인 학생 리더십의 개발과 일찍부터 분명한 신앙과 가치관을 갖춘 것이 중요한 요인이었것이다. 이들이 사역을 시작한 것이 각 단체의 사무국장을 맡지 않았던 시기라는 것도 이유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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