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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역사 이야기

[고신역사 아카이브] 53. 2천 년대의 고신교회와 오늘의 현실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53. 2천년대의 고신교회와 오늘의 현실

올해 70주년 행사를 가졌던 고신교회(총회)의 역사 기산은 1952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 발회를 기준으로 한다. 그러나 그 뿌리는 1차적으로는 1946년 9월 고려신학교 개교, 더 근원적으로는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 후 부산경남, 평안도, 만주 등에서 있었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그 연원으로 하고 있다.

해방 후 출옥성도들이 경남지방에서 회개운동과 교회쇄신운동을 전개하면서 경남노회에 전권위원, 특별위원 등이 파송되었고, 1951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6회 총회(속회)에서는 정통성있는 경남노회를 총회에서 추방하였고, 경남(법통)노회는 한 해를 더 기다렸다가 1952년 대한예수교장로회총노회를 발회하여 독자적인 치리회로 존재하게 되었다.

고신교회는 이후 교회쇄신운동을 지지하던 교회와 성도들의 참여로 꾸준히 성장하였고, 부산경남 외 지역으로 확산해, 경북노회(1953), 경기노회, 전라노회(1954), 부산노회, 진주노회(1956)가 조직되면서 1956년에는 총회로 승격하였다.

1960년에는 박윤선 교장의 철수에 따라 승동측과 합하여 합동총회를 구성하였지만, 3년만에 환원하면서 교세의 30% 이상을 잃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1970년대에는 교단 내 분쟁으로 분열의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교회가 꾸준히 성장하여 2천년대에는 1,800교회가 되었고, 지금은 35개 노회에 2,200교회에 이르고 있다. 고신교회에 총회 유지재단, 학교법인 고려학원, 총회은급재단이 법인으로 존재하고, 준법인으로 총회세계선교회와 총회교육원이 있다. 해외에 재미총회(1985)가 조직된 이후 연이어 유럽총회와 대양주총회가 구성되어 해외에 220여 교회를 두고 있다.

1990년대부터 교회들이 꾸준히 성장하여 교단적으로 수도권 열세의 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시작된 총회회관이 준공(1993)된 이후 교단 내 전문사역 기구들이 안정적으로 성장했다. 교육(총회교육원), 선교(KPM), 학생운동(SFC), 언론(기독교보와 월간고신)이 크게 성장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고신교회는 복음에 충실할 때 교회 성장과 내실을 기하였고, 전문사역 기관과 사역자들의 자율성과 전문성이 확보될 때 총회적인 지원 없이도 해당 기관의 괄목할만한 성장이 있었다. 이는 오늘의 교회가 배워야 할 역사적인 교훈이라 하겠다.

2천년대에 고신교회가 안정적으로 성장하였고, 3천교회 운동이 가속화되면서 교회 개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개교회의 성장이 두드러졌는데, 지역을 대표하는 교회들이 등장하면서 부산과 경남지방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회복하였다. 특히 이들 교회는 선교에 적극적인 활동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나뉘어졌던 형제들이 하나가 되어 서경노회와 고려측 교회들이 지역교회에 편입되어 수도권 교세가 보강되었다.

또 노회의 요청에 의해 기준없이 분화되던 노회가 재정비되어 일정한 규모의 노회로 정비되어 효과적으로 사역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2천년대에 접어들면서 교단 행정이 체계화되고 그 위상이 달라지면서 총회장을 지낸 인사들이 대외적인 교단연합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대한성서공회 이사장이나 한국장로교연합회 회장단에 취임하여 교단의 위상을 높이기도 했다.

2천년대에 들어와 교단창립 기념사업이 세 차례 있었다. 교단 설립 50주년 기념대회(2002)가 해외총회들이 함께 모였고, 허순길 교수에 의해 역사 편찬이 이루어졌다.

60주년 기념대회(2012)는 부산사직운동장에서 모인 대대적인 집회로 개최하였고, 헌혈과 사회봉사 등에 관계기관과 협력하여 동참하였다. 70주년을 준비하며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교회의 오늘과 내일의 방향을 제시하는 세미나와 역사 세미나가 있었다. 지난 한 해 동안 ‘70일 특별새벽기도운동’이 전개되었고, 이상규 교수를 대표집필자로 하여 고신총회 70년사 편찬이 이루어졌는데, 필자도 11개 항을 집필하며 참여하였다. 고신총회 70년사는 여러 집필자들이 참여해 일관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었지만, 비교적 잘 정리된 편이다. 70주년 기념대회는 펜데믹의 영향으로 제72회 총회에서 간소하게 진행된 것은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최근들어 오랫동안 저출산의 결과로 학령인구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대학들이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그동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해 대학의 위기가 눈앞에 다가왔다. 교회의 목회자 양성에서도 근래 종교에 대한 무관심으로 교회가 쇠퇴하고 있으며 펜데믹이 이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위기는 대학만 아니라 신학대학원 진학도 급격히 줄어들어 교회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처지로 내몰리고 있다. 한국사회와 교계에서 오래전부터 위기의 알람이 울렸지만, 당국자들이 구체적이고 실효성있는 대책을 마련하지 못해 위기가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의 당면과제이기도 하다.

2천년대에 접어들면서 신학대학원 졸업생의 편차에 따라 이전과 달리 총회장의 세대교체가 일어났고, 교단정치에서 계파가 힘을 발휘하면서 학교법인과 총회 행정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때 학교법인 이사회에서는 총장 선출을 위해 스무 차례 이상 투표하기도 했다. 이사회 안에서의 반목과 갈등은 임시이사 파송의 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2천 년대의 고신교회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사건은 학교법인 고려학원에 임시이사가 파송되어 ‘고신교회의 바벨론 포로’를 겪은 일이었다. 지금은 총신대학교가 그러한 전철을 밟고 있다. 이같은 일이 진보적인 신학을 가진 교단들보다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교단에서 자주 일어나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이는 고등교육이나 총회 운영에서 합리적인 행정이 아니라, 교권의 지배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같은 일이 1970년대 한국교회 분열과 이후의 한국교계에서 특정교단의 역할이 두드러지는 것은 반면교사를 삼아야 할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를 강조하면서도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소홀히 한 것이 아닌지, 또 자신의 방법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개인이나 교회의 일을 하면서도 나와 같은 방식이 아니라고 이를 거부하거니 적대시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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