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총회 40년] 2. 유학생들의 모임 재미SFC
- 작성자 : EU기획홍보처
- 24-10-23 12:37
2. 유학생들의 모임 재미SFC
나삼진 목사(Evangelia University 교수)
1946년 9월 20일 개교한 고려신학교는 조직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다 투옥되었던 한상동 목사와 주남선 목사의 옥중 기도와 비전에서 시작되었다. 한상동 목사가 옥중에서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정신을 이을 목회자로 평가받아 해방 후 평양 산정현교회의 청빙을 받아 시무하던 중에 공산당과의 갈등과 모친 별세로 남하하였다.
제1회 남부대회(1946. 6. 11-14)가 조선신학교를 총회가 직영하기로 가결하면서 한상동 목사는 주남선 목사와 박윤선 목사와 함께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기성회를 발족시키는 한편 서둘러 진해에서 신학 강좌(1946. 6. 23-8.10)를 열었다. 이는 6주 과정의 여름 학기와 같았다.
신학자가 많지 않았던 때, 설립자들은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초빙할 계획으로 박윤선 교수를 교장 서리로 하여 고려신학교를 개교했다. 처음에는 박윤선 교수가 많은 과목을 가르쳤다. 만주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다 투옥된 바 있던 한부선 선교사가 입국하면서 교수로 합류하였고, 연이어 함일돈, 마두원 등 선교사들이 신학교육이 교육의 짐을 함께 졌다.
교수가 부족하여 인재 양성의 필요를 절감한 고려신학교 당국은 개교 때 입학하여 예과 2년 본과 3년 과정을 이수한 제5회 졸업생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세 사람을 미국에 유학 보내었다. 이들은 신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아 공부를 하였으나 방학 때마다 학내 혹은 인근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그런 중에서도 이들은 틈을 내어 필라델피아에서 만나 교제하였고, 유학생들이 증가하면서 SFC라는 이름으로 조직을 갖추고 수양회로 모였다. 이것이 고신교회 성도들의 미국에서의 첫 모임이 되었다. 이들은 〈파수군〉에 유학생 소식을 올렸고, 많은 고신교회에서는 이들을 ‘고신의 아들’로 생각하며 기도하였다.
유학생들의 수양회와 재미SFC 창립총회는 1958년 6월 4일부터 7일까지 미국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개최되었다. 총회에서는 위원장 오병세, 총무 홍창표, 회계 손영준, 대내부장 한기범, 대외부장 강진선 등을 선임하였다. 이들은 그해 9월에 열린 제8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 재미 SFC 조직을 보고하도록 했다. 총신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김의환 박사는 오병세가 그 모임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고 했다.
이러한 수양회는 2년 후 1960년 6월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커버넌트신학교와 제일장로교회에서 커버넌트신학교 헤리스 교수를 강사로 개최하였다. 제8회 총회에서는 조용석이 회장에 선임되었는데, 이들은 모일 때마다 후배를 아껴주고 학업을 격려하는 등 한국교회 미래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들 유학생들 모임은 그들이 학생 시절에 경험하였던 SFC라는 이름이었는데, 1961년 말에 회보 The Korean Student for Christ라는 회보를 옵셑 인쇄로 발행하였다. 제2호에는 한상동 목사가 해외 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영어로 번역하여 두 면에 걸쳐 실었고, 김진경 교수 간증, 17명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훼이스신학교 학생들이 한기범 목사 가정에서의 모임을 가졌음과 홍반식과 오병세의 박사 학위 소식 등을 실었다.
1968년에는 형태를 달리해 The SFC Bulletin이라는 이름으로 발행하였다. 이 시기에 손영준이 회장으로, 김상복이 편집인으로 회보를 발행했는데, 타이핑 후 복사하여 제3호는 단면 12면, 제4호는 양면 8면으로 인쇄, 발행했다.
이러한 재미SFC 모임은 재미총회가 형성되기 25년 전의 일로서 고려신학교 출신 유학생들과 고신교회 성도들이 미국에 건너가서도 서로의 믿음과 학문을 격려하며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고, 재미총회 형성의 한 원류가 되었다.
사진 1: SFC라는 이름으로 간행된 유학생 회보(1961)
사진 2: The SFC Bulletin(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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