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교사 열전] 50-2 Charles A. Clark (찰스 클락, 곽안련 郭安連) 선교사 ②
- 작성자 : Henry Park
- 20-10-17 14:42
Charles A. Clark (클락, 곽안련 郭安連) 선교사 ② 1902년 입국
양화진에 묻혀있는 곽안련 선교사의 두 아들(맏아들 Burton과 둘째 아들 Gordon)
먼저, 자신이 등장하여 이색인종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자신이 조선(한국)인이 알고 있는 노래의 주제를 화제로 삼아
몇 마디 한다. 어김없이 몰려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 되면 자신은 물러나고 자신의 전도팀에 있는 조선(한국)인이 등장하여
전도를 하게 한다. 마지막 단계는 자신들의 전도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사람을 발견한다. 그때 곽안련 선교사는 그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그가 사는 동네를 방문하게 된다. 그 방문은 바로 개척교회로 이어졌다. 구원의 진리를 알지 못하는 조선
(한국)의 영혼들을 얼마나 사랑했었는지를 보이는 그의 선교의 의지를 여기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곽안련 선교사는 교회만을 섬기고 순회하는 목회에만 머문 목사는 아니었다. 그는 1905년부터 승동교회 안에 면려회
(Christian Endeavor Society)를 조직하여 청소년 사역에 정성을 기울일 뿐만 아니라 주일학교 교육에도 남다른 열정을
쏟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회적으로 음주와 흡연의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자 조만식과 채필근이 중심이 된
조선물산 장려회의 자문위원으로 참여를 하면서 사회의 정화를 위한 목회자의 모습을 유감없이 나타내기도 하였다.
곽안련 선교사는 학문의 존재 가치를 탁상의 이론만으로 머문 것을 원치 않고 현장의 실천에서 그 가치성을 인정하고
있었던 학자였다. 그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 조선(한국)의 선교부는 그를 신학교 교수의 일을 맡길 의향이 있었으나 그는
목회의 장에서 먼저 선교의 발길을 다지기로 결심하고 교회를섬기는 현장을 찾았었다. 그는 갖은 불편을 다 겪으면서 배운
바를 목회의 장에서 먼저 실천하는 본을 보였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학자적 자질을 아는 평양신학교에서는 한 교수가 선교지를 떠나야 했기에 승동교회에서 담임을
하고 있는 그에게 출강을 요청하고 1908년 5월에 평양신학교에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때 그의 손에는 그의 스승 존슨
(Herick Johnson)의 ‘설교학 강의안’이 번역이 끝나고 출판을 서둘고 있었던 참이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교수진들은
무척이나 기뻐하면서 그를 반기었다. 그의 말대로 아무도 당시의 평양신학교에는 설교학 분야의 강의를 할 수 있는 교수는
없었다. 그가 설교학을 강의하기 시작했던 때는 1907년 대각성부흥운동의 파도가 전국을 한창 휩쓸던 시기였다. 이때
말씀의 바른 선포와 해석과 적용을 위한 교육은 어느 과목보다 절실한 때였다. 바로 그 때 그가 설교학 책을 들고 평양
신학교에 입성하였다는 사실은 한국교회에 깊은 뜻을 두신 하나님의 섭리라고 봄이 타당하다.
그가 강의를 시작했던 평양신학교의 교과과정에는 설교학이라는 과목 자체가 없이 다음과 같이 짜여져 있었다.
- 신학일반 및 소요리문답: 마포삼열(Samuel A. Moffet)
- 구원론: 배위량(William M. Baird)
- 유대사기: 소안론(William L. Swallen)
- 목회학: 이길함(Graham Lee)
- 마태복음 및 고대사: 한위렴(William B. Hunt)
- 모세오경: 배위량, 소안론
- 산수: 편하설(Charles F. Bernheisel)
그 때부터 그는 서울의 목회의 장과 평양의 선지동산을 오르내리면서 새로운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곧 이어
목회학과 교회법을 추가하여 강의하게 되었다. 그가 1916년 평양신학교의 전임교수가 되어 실천신학 학과장이 되자 그는
1922년 평양으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실천신학의 기틀을 잡아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설교학, 설교실제, 예배모범,
목회학, 목회실천, 교회정치와 권징, 교육학, 청년사역, 사회봉사, 개인전도, 기독교 심리학, 아동 심리학, 주일학교 조직
등의 과목을 만들면서 실천신학의 분야를 점차 넓혀 나가게 되었다. 이 때부터 평양신 학교는 실천신학이 교육의 전체
흐름을 주도하는 느낌을 풍기면서 조선(한국) 교회의 신학과 목회의 요람지로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그가 조선(한국)의 땅에서 한국선지생도들에게 교육을 시킴에 있어서 그는 다른 교수와는 그 교육정신이 달랐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그의 회고록에 담긴 다음의 한 구절은 예사롭게 넘길 수 없는 말이다.
“교수들은 초창기에 영어를 가르치는 것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가치를 인정하고 개별적으로
원하는 학생들에게 정규 과목과 별도로 교육을 시켰다.”
여기서 곽안련이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한 혜안이 남달랐다는 사실과 조선(한국)교회 지도자 양성에 일찍부터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이러한 투철한 교육 이념이 그의 가슴에 있었기에 1908년부터 발을 들여놓은 실천
신학교수의 사명은 1939년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하여 강제로 폐교되기까지 교수의 직을 고수하면서 1,600명에 이르는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에게 실천신학을 심어주었다.
곽안련 선교사에게는 이상과 같은 많은 강의와 주말마다 쉬지 않고 교회를 순회하면서 성례를 행하여야 하는 막중한 사역을
감수하였지만 그에게는 어느 선교사도 따라올 수 없었던 또 하나의 탁월한 기록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저술
활동이었다. 그는 “나는 51권을 책을 펴냈다”고 말하면서 이 부분에 대한 자랑스러운 회고를 하고 있다. 그가 밝힌 바에
의하면 42권은 조선(한국)교회를 위하여 펴냈는데 그 20여권은『 설교학』을 비롯한 실천신학 교제였고, 그 외는 주석서를
비롯한 성경연구에 필요한 책들이었다. 영어로는 7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는『한국에서 맺은 첫 열매들』(First
Fruits in Korea)과 『한국의 전통 종교들』(Religions of Old Krorea)을 비롯하여, 선교정책에 소중한 지침서로 널리 알려진
『한국선교사역에 네비우스 정책』(The Nevius Plan for Mission Work in Korea)등을 2 권의 스페인어로 된 저서를
남겼다.
이토록 많은 책을 펴낸 것이 그의 저술 활동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평양신학교에서 1918년부터 발간하였던 『신학지남』
에는 언제나 곽안련 교수가 주요 기고자였다. 그는 이 간행물을 통하여 일선 목회자들에게 설교의 이론과 실제를 제공
하기에 바빴음을 “나는 신학교교육을 보완하기 위하여 22년 동안 신학지남을 발간하였고 최소한 그 원고의 6분의 1은 내가
집필하였다.”는 말에서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곽안련 선교사는 분명코 한국교회에 설교학을 중심한 실천신학의 씨앗을 유감없이 뿌렸다. 그리고 그 씨앗은 오늘의 한국
교회를 이룩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밀알이 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승동교회사에서 발췌)
『계속』
박흥배 목사
안디옥 세계선교협의회 회장
왈브릿지 열방교회 담임목사
revpark00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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