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고신총회 40주년 추억하면서 1부
- 작성자 : 박종칠
- 24-10-24 12:29
(뉴저지 안디옥 장로교회, 2024. 10. 7-11)
이 번에 우리 두 내외가 4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의 교회(양성일 목사)와 휴스턴 한인 장로교회(정영락 목사)가 비행기 값과 숙소비를 담당해 주었기에 기능했다. 주님께 감사합니다. 전 총회장 정인석 목사가 40주년 기념 해이기도 하니 같이 가자고 권유도 있고 정성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내가 직접 부탁을 하였지만 그래도 인정받는 우영종 박사에게 두 목사에게 잘 할 수 있도록 격려해 달라고 하였다 그는 그렇게 하였고 그리하여 우리 내외는 빛나는 40주년 행사에,참석할 수 있었다. 역사는 이렇게 해서 꾸며지고 있다. 그리고 사실 나는 성경연구 한다고 재미로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아내는 성경 읽고 나의 건강을 위해 매일 삼시 세끼를 준비하니 교제와 휴식이 필요하였다..아내에 대한 배려 인데 내 힘으로 안 되니 도움을 구하였는데 단번에 흔쾌히 허락하니 고신 정신의 기상이고 교회였다.내가 이름을 들먹임은 내가 잊지 않기 위해서 이고 혹시 우리 자녀들이 기억해 주기 바래서 이다. 이번 총회시에 참석한 모든 종들을-안면이 있든 없든 -나는 진심 어리게 다 같이 구별하지 않고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아주기 바래요. 총회 때에 가능한 만날 때 마다 악수하고 인사를 나누니 나는 기뻤습니다.감사합니다.
“기념” 이라는 말이 나에게 선뜻 들어오지 않았기에 영어가 commemoration 이다 기억이고 추억이다. 요즈음 나의 육체의 특징은 남의 이름이며 과거가 많이 잊어 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억할 수 있는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있고 사건들이 있다. 과거가 있는 것은 우리가 추억해 내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 아닌가! 재미 고신이 벌써 40년이 지났다! 지난 72년 8월부터 79년 .10월 까지 7 년 간의 유학 시절이 있었지만 우리가 정식으로 미국에 이민 온 해는 2003년 12월 23일이다. 그러니 우리 이민 교회의 거의 반 20년을 같이 해 왔다. 지금 내 나이가 만 83살 반년이다. 그러고 우리 내외는 개 교회들을 많이 접촉하였다..우리 차를 몰면서 Preaching Tour 라는 명목 하에 노회와 총회 기점을 해서 미국과 카나다를 17회나 돌았다. 와이오밍과 사우스 다코타와 하와이 만 못 가보고 미국 47주를 돌았다 한 번 나가면 적어도 한 달 반 이상 ,어느 때는 하루가 빠진 99일간 설교와 전도로 돌아 다녔다. 그래서 내가 속한 중부 노회록의 어느 페이지는 나의 공식 직함은 “선교사” 이다. 그때에 우리 동역자들의 영접과 환대를 잊지 못하고 있다. 나의 잊음을 하지 않도록 여행기와 시진을 저장해 두었다. 말하지만 누구보다 이민 교회 젊은 동역자들이 주님의 교회와 함께 하는 아픔과 애환이며 또한 즐거움을 듣고 조금이나 만 알고 있다.
40년 역사 이니 이번에 참석한 회원들 특히 영어권 목사님들이 눈에 띄게 많이 보였다. 너무나 반가운 현상이다 우리들의 출발시는 저들에게는 유아기 시절일 것이다. 우리의 과거 역사를 젊은 주의 종들에게 친숙히 알려 주어야 한다. 저들은 서양의 문화에서 교육받고 자랐기에 우리의 단순한 정서적 신앙적 분위기를 체득케 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우리가 과거 역사에서 했으며 고난스럽게 걸어 와야만 했던가 하는 그 이유와 동기의 핵심을 알려 주어야 한다. 우리 교회 미래가 그들에게 많이 달려 있다. 우리의 역사를 기(추)억해 보는 것은 과거를 회고하는 데 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신의 신앙 형편을 조명해 보며, 본분을 깨달으며 꺼져가는 진리의 영혼을 더 높이 들어 미래의 후손들애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데 있다. 우리 비록 연약한 인생이지만 “지존자의 오른 손의 해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들을 기억하며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시77: 11)
그런데 나에게 부닫힌 문제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이 내게 주마등처럼 많이 순서 없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 중에 어느 하나님의 일들을 선택하여 후손들 마음에 인식시키는 것이 좋을 가 하는 내가 경험한 (기억 ) 자료 선택 문제이다. 그리고 나는 총회 실무 스테프가 아니기에 역사적 흐름을 연결도 꿰뚫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더구나 미국에 와서 영광스러운 주님의 교회를 개척하거나 섬기는 경험을 하지 못한 자로서 그야말로 은퇴목사(혹은 은퇴교수)로서 참가한 한계가 있다. 그러나 우리 제자 목사님들이며 타 교단 교회 동역자들을 많이 만난 추억이 있고 그 상과 원리가 떠오르고 있다. 그러니 나는 과거나 현재나 사건의 흐름을 추적하기 보다는 개념적 원리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추억의 유산들
총회 장소인 뉴저지 안디옥 장로교회는 우선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을 상징하는 교회가 되었다. 미주에서 고신의 깃발을 세웠던 뉴저지 한인교회 에서 갈라져 나왔던 교회, 그 당시의 담임 목사는 가슴 아프고 미웠지만 40년이 지나고 보니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고 이제 이 교회에, 내가 와서 옛 성도들을 만나니 눈물이 나고 고맙다고 하셨다. 이제 안디옥 교회는 40년의 광야 이민 교회의 목자들을 숲 속의 아름다운 가든에 초청하여 풍성한 밥상을 차려 놓고 먹이고 있으니 40년의 피로가 녹아지면서 또 40년의 여정을 걷게 하는 미래의 기억에서 제외 될 수 없을 것이다. 당회 어느 장로님은 .내가 불편하게 보인다고 밥 그룻에 음식을 챙겨주는가 하며 이 교회 이 목사는( 내가 안면이 없기는 하지만) 소화가 불편하여 숙소에 있는 내 아내에게 갖다 주라고 저녁을 챙겨 준다. 어떻게 사정을 알았는 지 나는 모른다. 교회도 고령화 되어가는 시절 21세기의 목회자의 철학적 인사이트가 돋보인다. 그런가 하며 어떤 사모도 모르는 사이 챙겨주니 저녁 밥이 두 그릇이 됐다
어쨌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세워진 이 교회는 교회 방송에서 은은히 울려 퍼지는 고전적 찬송가 가 마음에 울림을 준다.그리고는 이 타락한 이 세상에서 복음의 아름다운 종(소리)이 울려 퍼질 것이다.
이렇게 광야 40년 역사에는 아픔도 있고 잠간이지만 먹고 쉬고 가는 안식처도 있다. 이것 때문에 먼거리지 만 40년을 추억하면서 귀한 종들이 많이 모였다 대견스럽고 장래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소망한다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
성도의 교제라는 차원에서 총회를 생각해 본다. 마지막 새벽기도 시에 단상에 세우신 우리 신실한 동역자.말씀이 우리들의 교제와 협력을 크게 생각케 하였다. 그는 본문을 전도서 4장9-12 절을 읽은 줄 안다. 내가 아는 학창 시절의 목사는 제 이 선에서 조용하면서 크게 야망을 가진 자라고 기억한다.그는 누구와 같이 꿈을 갖고 미국에 왔을 것이고 하나남의 부르심을 받아 클리버랜드 한민 장로 교회에서 목회 한 지가 16년이 지났다. 우선 우리 교단 무리들을 만나려면 한국 식으로 말하면 수 만 킬로에 떨어져 그야 말로 황야 지역에서 홀로 철 없는 양떼들(? 내 말입니다)을 안고 목회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겠느냐? 같이 의논할 옆 집 친구도 없이. 그는 설교단에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자제된 침묵의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황야에 홀로 서 있는 고독자 목회자 ! 자기와 함께 삽 겹으로 쌓아 주는 한 동무가 되어주는 목회자의 진정한 교제를 갈망하는 종이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실감한 세월을 감격하는 눈물 인 줄 안다.
나는 그 새벽에 기도하고 있는 종에게 나아가서 주님이 그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심정으로 조용히 “ You are great pastor” 라고 귀에 말해 주었다.그는 예수의 환난과 나라에 동참하고 있다. 우리 교단 어느 목사이든 이렇게 사역하지 않은 종이 있겠느냐! 내가 여러분을 존경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나는 한없이 부족한 종임을 느끼고 살고 있어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21세기의 영적으로 황폐된 . 광야에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교회를.세우시려고 신실한 중들에게 주의 위로가 넘치기 기도합니다.
재미 고신총회 40주년 추억하면서(11)- 계속됨
기억해야 할 물려받은 유산들
댓글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