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 William J. McKenzie (윌리엄 맥켄지) 선교사 ②
- 작성자 : Henry Park
- 20-06-06 10:38
William J. McKenzie (맥켄지) 선교사 - 1893 입국
멕켄지 선교사는 가장 큰 힘이 되었던 조선(한국) 첫 교회의 감격 어린 예배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겨 듣는다. 아무도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하시는
바가 세상 끝날에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는 기독교인들을 보는 것은 나에게는 큰 위로다.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혼란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기쁨에 가득 차있다. 사람들은 차가운 추위와 눈보라도 마다하지 않고
하나님께 열심으로 예배하며, 예배처소에 자리가 없을 때에는 밖에서 서서 예배를 드린다. 더 이상 앉을 곳이 없어서, 장막
뒤의 여인들은 아이들을 안고 서서 예배를 드린다. 더욱이 이러한 사람들이 뜨거운 회개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릴 때의
감격은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다.”
매일매일 주민을 위하고 주변의 마을을 다니며 전도하는 등 추우나 더우나 전도사역을 멈추지 않았는데 그러는 어느 한
여름에 그는 일사병으로 쓰러지게 되었다. 이는 계속되는 극심한 과로로 몸은 지쳐 기력이 쇠하게 되고 한여름에도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어도 전도사역으로 많은 곳을 다녀 뜨거운 햇볕에 장시간 노출이 되고 부실함 음식물로 인한 영양결핍과
풍토적 환경에 따르는 몸의 거부 반응 등 여러가지 요인이 합쳐져 고생을 하다가 결국은 일사병에 걸려 쓰러지게 된 것이다.
그래도 속히 일어나 사역을 하려고 하였으나 정신이 혼미해져 이를 이기지 못하고 갖고 있던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6월 23일(토요일)
“…(전략) 잠을 잘 수도 없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너무 약해졌기 때문이다. 오늘 오후에는 전신이 추워지는 것을 느꼈다.
옷과 더운 물주머니가 있어야겠다. 땀을 내야겠다. 조금은 나은 듯하기도 하다. 죽음이 아니기를 바란다. 내가 조선(한국)
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았기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게 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내가 조심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낮에는 뜨거운 햇볕 아래서 전도하고 밤이면 공기가 추워질 때까지 앉아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중략)
… 몸이 심히 고통스러워 글을 쓰기가 너무 힘이 든다.” - 맥켄지 선교사의 일기 중에서
30세도 안 된 젊은 나이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하기 전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솔내 교인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맥켄지 선교사의 죽음을 듣게 된 고국 캐나다에서는 조선(한국)에 다시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을 하고 선교사를 모집하여 더 많은 선교사들을 조선(한국)에 보내게 된다. 맥켄지 선교사의 사랑이 담긴
삶과 희생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싹이 트게 된 것이다.
맥켄지 선교사의 약혼녀 맥컬리(McCully)는 조선(한국)으로 가는 태평양을 건너며 맥켄지 선교사의 비보를 접하게 된다.
조선(한국)에 입국하여 바로 솔내로 가서 비석을 세우고 그의 유산을 솔내교회에 기증하게 되는데 이는 솔내 제일학교 설립
기금으로 쓰이게 된다. 이후 그녀는 귀국을 하지 않고 함경도 원산지방으로 가서 선교활동을 하게 되었다. 맥켄지 선교사의
비석의 후면에 있는 글은 그의 약혼녀 맥컬리가 썼는데 그 내용은, “1893년에 맥켄지 목사가 캐나다로부터 여기 내류할 때
동포는 외인을 살해하려고 하고 교인은 몇몇 안되는 때라 폭염에 열심히 전도하더니 열병에 정신없이 기세하여 일동이
애석해 하며 다 주를 믿는지라. 주의 말씀에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열매다 많다 함이 옳도다. 솔내 교회는 조선
(한국)의 처음 열매요 목사의 몸은 여기서 자도다.” 『계속』
박흥배 목사
안디옥 세계선교협의회 회장
왈브릿지 열방교회 담임목사
revpark00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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