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 반대 운동(퍼온글)
- 작성자 : HesedMoon
- 17-05-03 18:01
1930년대에 일본은 한국에 대한 수탈과 지배 체제를 강화하였고 한국 기독교에 대해서도 탑압을 강화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일본어 사용, 창씨 개명, 신사참배 강요였다. 신사(神社)는 일본인의 조상신 곧 국조신(國祖神)과 무사신(武士神) 등을 모시는 사당이다. 신사참배는 일본 천황이 인간의 몸으로 나타난 신이라고 하여 천황숭배가 이루어지면서부터는 천황에 대한 충성과 존경을 나타내는 종교행위로 사용되었다. 일본은 대륙침략을 강화하면서 국력과 국민 정신을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해 한국인을 황국 신민화하면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세우고 각 중요 도시, 읍, 면 소재지 등에 신사를 건립했다. 신사 존재 자체가 기독교인들에게는 우상숭배였다.
1935년 평양에서 교장회의가 열릴 때 일본은 교장들에서 학생들을 앞서 신사에 참배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미션 스쿠울이었던 숭의 여고와 숭실 전문학교 교장은 이를 거부하여 교장직을 박탈당했다. 이를 계기로 호남 지방에서 사역을 하던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를 중심으로 전주에서 선교사 회의를 소집하고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이다'는 이른바 풀턴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선교부 총무가 풀턴(C.Darby Fulton) 목사였기 때문에 그렇게 명했다. 1937년 일본은 각 학교에서도 신사에 참배할 것을 강요했다. 당시 남장로교 계통의 미션 스쿠울이었던 숭일, 수피아, 영홍, 정명, 매산, 신흥, 기전, 영명 학교들이 거부하다가 폐교되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북장로교 계통의 미션 스쿠울인 계성, 신명, 명신, 보성, 신성, 영실, 경신, 정신 학교들이 거부하므로 잇달아 문을 닫았고 평양신학교도 거부하다가 폐교되었다.
신사참배에 대해 천주교와 감리교는 일본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가 의식이라 하여 신사참배를 허락했다. 일본은 장로교만 굴복시키면 된다는 생각에 장로교에 여러 형태를 압박을 가했다. 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1938년 2~3월에 열리는 노회가 평북 순천노회를 필두로 23개 노회중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했고,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27차 조선 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이 총회에는 193명의 총대가 참석했는데 97명의 일본 경찰이 사이 사이에 끼어 앉아 신사참배를 가결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이 때 총회장은 홍택기 목사였다. 이 때 한부선(B.F.Hunt), 방위량(W.N.Blair) 목사는 사회자의 불법적이고 일방적인 진행에 항의했다. 그러한 결의가 있자 YMCA를 통해 농촌 운동 등을 주도했선 홍병선 목사 등의 상당수 기독교 지도자들은 신사참배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가결 후 총회장 홍택기,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의 안내로 평양 신사에 가서 참배를 했다. 이어서 감리교 양주삼, 김종우 목사와 성결교 이명직 목사 등이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여 일본 신궁을 참배하고자 서울을 출발했다.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고비로 전국 각지에서 신실한 기독교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격렬히 일으켰다. 평양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와 평북 이기선, 경남 한상동 주남선, 평남 이주원 전도사와 순천 애양원 손양원 전도사와 여성 안이숙, 조수옥, 재건파의 최적지 등이 대표적이다. 한상동 목사는 주기철 주남선 목사와 함께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조직적으로 구체화하여 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투옥된 사람은 1945년 해방된 때까지 2,000여명에 달했고 200여교회가 폐쇄되었고 50여명이 순교했다.
해방 후에 교회 정화 운동이 일어났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면서 공산주의에 대처하기 위해 일제에 봉사했던 관료 군인 경찰 재계 실력자들을 재등용했다. 그래서 친일 세력들이 정권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교회도 그런 영향을 받아 신사참배에 앞장 섰던 자들이 교회 지도자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 때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감옥생활을 하고 나온 목사들이 한국 교회의 순결과 회개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결국 교권주의자들로부터 밀려나 세운 교단이 교려파 곧 고신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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