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11-26 13:04
유해무 교수, 우리가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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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HesedMoon
조회 : 2,631  

 

유해무 교수, 우리가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과연 고신교회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지난 10월 27일 고려신학대학원 대강당에서 있었던 신대원 개교 7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유해무 교수는 Ecclesia semper reformanda: 고신교회와 신학 70년의 회고와 전망라는 주제의 논문을 발표했다유 교수는 논문을 통해 고신교회와 고신신학의 키워드를 회개라 말하며건강한 개혁신학은 진정한 회개 위에 가능하다고 밝혔다. '개혁을 위해 세워진 고신교회가 이제 개혁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는 발표자의 외침이 참석자들에게 선자자의 음성으로 들리는 듯 했다독자들을 위해 선지자적 논문으로 평가 받은 유 교수의 원고를 싣는다. (편의상 각주는 생략한다.)

  
▲ 유해무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Ecclesia semper reformanda: 고신교회와 신학 70년의 회고와 전망

 1938년 제 27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신사참배를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적 의무라는 이름으로 통과시켰다총회 임원들은 곧 신사를 참배하고급기야는 암데라스 오미가미에 완전 귀의한다는 예식으로 7번 물에 담그는 미소기 바라이라는 재세례까지 받는다. 선교사들이 설립하고 운영하던 중등고등교육 기관들은 참배를 거부하다가 강제로 폐교를 당하고유일한 장로교 신학교인 평양신학교도 폐교 당한다참배를 거부한 많은 이들이 만주나 일본으로 피신하거나 구금 또는 투옥되었다이런 와중에서 친일적 인물들이 서울에 조선신학교평양에 후()평양신학교를 연달아 개교한다옥중에 있던 몇 목사들은 신학의 정화를 통한 목사 양성을 꿈꾸면서 평양신학교를 이어 정통신학을 가르칠 신학교의 설립을 구상한다이런 구상에 기초하여 1946년 9월 20일에 고려신학교가 개교하였다이 신학교는 총회가 아닌 경남노회의 결정으로 설립되었으나그 노회와 총회에서 교권을 장악한 친일적 인사들의 농락으로 총회와 무관한 학교라는 총회의 결정으로 설립자들과 지지자들은 총회로부터 축출되어 무원지대로 쫓겨났다고려신학교를 지원하는 교회들은 불가피하게 1952년에 총노회를 조직하고 총회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한다총회는 아무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1956년에 총노회는 총회로 개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올해는 고려신학교 개교 70주년이다고신교회의 역사는 이보다는 짧지만고려신학교의 역사를 떠나서 고신교회의 역사를 말할 수 없다이점을 고려하면서 공히 70주년을 적용한다그간 한국사회와 교회에는 수많은 일이 일어났다한국은 제 2차 대전 이후에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유일한 피식민국가이다이런 급격한 경제 성장에 한국교회도 교회사에서 전무한 성장을 이룩하였다현재 한국은 저출산의 여파로 급속한 인구 노령화를 겪는데교회 또한 이 현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서구에서 경제적 안정은 교회의 세속화와 공동화를 가져왔듯이 한국교회 역시 이런 형편에 처해있다고신교회와 신학도 이런 큰 흐름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한국의 다른 교회와는 달리 성장에서 느렸지만쇠퇴의 속도도 느리고 유년주일학교가 다른 교회들에 비해 상대적이긴 하지만 건재하다고신교회의 신학과 설교도 독특성을 지니면서 한국교회에서 때때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본고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잘 표현하는 항상 개혁해야 하는 교회를 모토로 삼아 고신교회와 고신신학을 회고하고 전망하려고 한다회고의 내용은 회개와 개혁이며전망의 내용도 회개와 개혁이다. ‘고려신학교 설립취지서’(1946)와 대한예수고 장로회 총로회 발회식 선언문’(1952)를 기초로 지난 70년을 비판적으로 반성하고 교회의 주인이신 삼위 하나님께서 하락하신 장래를 향하여 나아가려고 한다.

 1. 고려신학교와 고신교회회개의 역사

지난 70년간의 고려신학교-고려신학대학-고신대학-고신대학교의 역사를 개괄하여야 고신교회의 역사를 알 수 있다고신교회는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경남노회 중심으로 불가피하게 형성된 교회이다고려신학교를 시발로 한 고신신학을 알아야 고신교회를 이해할 수 있고고신교회의 현재를 알면 고신신학과 고신대학교/고려신학대학원의 현주소를 알 수 있다.

고려신학교는 해방 후 출옥한 한상동(1901-76), 주남선 목사(1888-1951)가 설립하였고박윤선 목사(1905-1988)와 한부선 선교사(Bruce F. Hunt; 1903-92)가 초기 신학 교육과 형성을 담당하였다거창교회에서 목회하던 주 목사와는 달리 한상동 목사는 제씨 한명동 목사(1909-2001)와 함께 현재의 고신대학교와 고신교회의 형성에 지대한 역할과 영향을 미쳤다한상동 목사는 옥중에서 한국교회 재건 방안을 구상하였다신학교를 설립하여 진리를 위해 싸울 참된 교역자를 양성하며전도인을 길러 교회를 개척하고수양원을 설립하여 신앙 양심을 더럽힌 교역자들을 재출발하게 한다는 세부 사항도 마련하였다.

3항으로 구성된 고려신학교설립취지서(1946)는 개혁의 여망을 담고 있다신학교 설립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1항에 간접적으로 나온다정통신학운동곧 진리운동이 시급하게 요청되는 상황에서 성경의 독자적 신임성(αὐτοπιστία)을 믿는 개혁교신학곧 칼빈주의 신학의 수립이다. 2항은 보통은혜(일반은총)원리의 영역에서 우리나라를 주님의 진리에 기초한 국가로 수립해야 함을 선언하고천국을 구하는 진리운동으로 建國에 협력하겠다는 원대한 입장을 천명한다. 3항은 신학운동은 문화운동이며켐브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이 교회대학으로 출발한 것을 언급하면서 기독교대학교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다창세기 1:28, 2:19절에 기초하여 인생을 자연정복자로 정의하면서 자연 숭배를 거부한다대학교를 설립하여 천국을 구하는 문화운동도 정통신학운동에 수반된다는 점을 내세운다해방 직후에 이런 취지서를 작성하고 신학과 건국과 문화에서 진리운동을 내세운 고신교회의 선배들의 웅대한 선언은 지금 보아도 위대하다이후 고신교회는 고려신학교를 폐지하고 고려신학대학의 설립을 교육부로 인가 받았고계속 고신대학과 고신대학교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그런데 올해 제 66회 고신총회는 고려신학대학원의 이름의 사용을 중지시키고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으로 이름을 고정시켰다모름지기 역사를 알아야 하지만이를 알지 못하는 이후 세대는 마치 고신교회의 초기부터 고신대학교가 있었고 그 한 특수대학원으로서 신학대학원이 있었다라고 알 것이다.

그렇지만 고신신학과 고신교회의 역사 70년 동안 설립취지서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어두운 면도 있다사조이사회 사건세속 법정 소송김해복음병원관선이사 파송리베이트에 의한 의대 소속 교수의 구속/불구속 기소 등은 설립취지서와는 무관한 다른 대학교나 불신 사회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사건들이다무엇보다도 고신대학교(복음병원 포함)가 취지서에 합당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토론이나 반성은 찾기 어렵다해방 직후에 돋보였던 취지서의 내용대로 현재 가르치고 있는 대학교에 고신교회의 자녀들을 보내는 것을 권장해야 하지는 않을까?

이처럼 고려신학교/고신대학교와 고신교회는 특이한 역사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교회가 신학교나 대학교를 세우는 일반적 순서가 아니라그 반대의 순서로 설립되고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따라서 고려신학교/고신대학교가 고신교회의 역사와 정신 형성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고려신학교 설립취지서는 1952년의 대한예수고 장로회 총로회 발회식 선언문의 내용과 방향에도 그 영향을 미친다그 이후 지금까지 고려신학교/고신대학교와 이사회는 총회에서도 항상 중요한 안건으로 상정되며때로는 논쟁과 심지어 무력시위(가령 부속 복음병원 노조 등)까지 동반되기도 한다.

역사에서 나타난 이런 관계는 그리 바람직하다고 말하기 어렵다출옥성도가 목표로 삼았던 신학교육을 통한 진리운동은 대학교와 이후에 복음병원을 관장하는 학교법인 이사회를 중심으로 하는 교권주의로 고신교회는 개혁교회의 모습에서 멀어진다고려신학교와 고신교회의 역사는 회개로 시작하여 여전히 회개해야 하는 역사이다.

 2. 고신신학과 고신교회개혁

고신신학은 한편으로는 한국교회의 일반적 경향과 궤를 같이 하면서도 다른편으로는 개혁주의라는 독특성을 지닌다한상동 목사로 대변되는 복음주의적 신앙과 목회는 한국교회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이후 고신교회 안에는 복음주의적인 목회가 지속되었으며출옥성도들과 고려신학교 출신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한국교회 목회자 일반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이 목회한다고 볼 수 있다.

부산과 경남은 1890년대부터 미국북장로교회의 선교 지역이었지만줄곧 호주선교부가 주로 선교를 담당하였다. 1889년에 첫 선교사 데이비스(J.H. Davies)가 그의 누나와 함께 부산에 도착하나6개월 후에 사망한다. 1891년에 5명이 다시 입국한다. 1905년에 진주, 1911년에 마산, 1913년에 통영과 거창에 선교지부를 개설하여의료와 교육선교를 병행한다첫 세례는 1894년 4월에 북장로교 파송 배위량(W.M. Baird) 선교사가 호주 여선교사들에게 배웠던 3명에게 베풀었다. 호주장로교회(빅토리아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는 미국이나 캐나다장로교회 선교보다 덜 관심을 받았다(145). 이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교리적 표준으로 받았지만 1920년 이후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초기 선교사들보다 진보적이었다이들은 미국 선교사들의 신학이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말하였다.결국 신사참배 반대와 일본 제국주의의 추방 정책으로 1941년에 모든 선교사들이 추방당하거나 철수함으로써 호주선교는 막을 내린다.

고신교회 안에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경향과 맥을 달리 하는 신학 전통이 있다면칼빈주의 또는 개혁신학이다이 노선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어려움을 당하였던 한상동 목사와 연관된 한부선 선교사와 박윤선 목사에게서 유래한다고 볼 수 있다한 선교사는 프린스턴신학교 출신이다(1924-1928). 이때는 이른바 구()프린스턴신학의 마지막 시절이었다그는 졸업과 동시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청주에서 사역하다가 첫 안식년을 맞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수학(1935-36)한 뒤에, 1936년에는 북장로교회를 탈퇴하고 미국장로교회(이후에 정통장로교회)의 창립 회원으로 가입하고장로교 독립선교부의 선교사로 파송받아 만주 봉천노회와 협력하였다. 1938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제 27회 총회가 부당하게 신사참배를 가결할 때 항의하였다. 1940년에는 장로교 언약”(The Presbyterian Covenant)을 만주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이들과 작성하였고, 1941-42년에는 옥고를 치른다. 1942년에 강제 추방당하였다가 1946년 10월 18일에 미국 정통장로교회 선교부의 파송으로 한국에 도착하여 11월 13일부터 1960년까지 고려신학교에서 실천신학과 선교학 등을 강의하였다.

한 선교사는 구프린스턴 신학과 메이첸의 영향을 받는다구프린스턴 신학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며신앙적 체험을 강조하고장로교 신조를 철저하게 수용하며, 17세기 개혁파 정통신학을 따르되 신학방법론에서는 스코틀랜드에서 발흥한 상식철학에 의존한다. 이 학교는 1892년부터 연례 선교 특강을 개설하여 학생들이 선교에 관심을 갖도록 하였다그러나 이 학교에 성경 비평과 신조에 대한 경시경건과 학문의 분리가 자리를 잡자메이첸은 1929년에 신조에 대한 신봉을 표방하면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하고, 1933년에 독립선교부를 창설로 제명 당한 다음1936년에 미국장로교회(정통장로교회로 개명)를 세운다이 교회 안에서 1937년에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주장하고 흡연과 음주를 반대하는 이들이 맥킨타이어를 중심으로 따로 성경장로교회를 설립한다그는 이후에 WCC를 대항하는 ICCC를 창설한다한 선교사는 여러 면에서 메이첸의 영향을 받고 따른다.

한 선교사는 고려신학교의 초기부터 협력한다여기에는 만주에서 겪었던 신사참배 반대 운동과 옥고를 치른 공통점그리고 박윤선 목사와의 학연과 신학적 연대가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장로교 언약이 부산과 경남에서도 사용되었던 것을 알고한상동 목사와 친밀감을 가지고 협력한다박 목사는 한 선교사와 봉천노회에서 같이 사역하였고, 1934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1935-36년에는 함께 수학하였다한 선교사는 고려신학교가 개혁신학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사실을 본국 교회 선교부에게 알렸다. 박 목사는 그를 자기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한 분으로신실과 정직의 모범을 보인 사람이라고 존경하였다한 선교사는 미국 장로교회의 전통을 따라 웨스트민스터신조를 신봉하고 타국에서도 믿음의 지조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고려신학교의 교수로서 개혁신학의 틀을 놓았으며열악한 재정을 위하여 주말 설교로 받은 사례를 신학교에 헌금하였다그를 위시하여 초기 교수들이었던 박형룡(1887-1978), 박윤선김진홍(1906-1988), 이상근(1911-2011), 김철현안용준 목사 등과 하도례 선교사(1925-2009)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졸업하거나 수학하였으니초기 고려신학교는 한국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같은 분위기였다. 한 선교사는 재건교회의 분리주의적인 교회론이 아니라 참 믿음과 회개로 개혁하는 장로교회의 회복을 추구하였다그의 의견을 따라 한상동 목사는 장로교회의 신조와 정치를 따라 신사참배를 회개하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하는 새로운 총노회의 결성안을 1947년 초 총회에 제출한다(355). 그러나1949년 제 35회 총회는 메이첸파 선교사와 상관하지 말라는 결정을 내린다이렇게 한국교회 70년사에서 이때처럼 교권이 행세된 때는 없었다.

1947년 9월에 박형룡 박사가 가담하여 10월에 고려신학교 교장취임식과 더불어 한 선교사와 박윤선 목사도 교수로 정식 취임한다이것은 마치 구프린스턴을 잇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처럼고려신학교를 옛 평양신학교를 잇는 행사였다그러나 박형룡 박사는 교회의 회개와 권징시행보다는 자유주의 신학의 척결에 주안점을 두었고이 때문에 그는 1년 후에 고려신학교를 떠난다그는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학이며 교회의 점진적인 개조가 가능하다고 여겼던 반면고려파 인사들은 신앙의 개혁과 정화로 이어지지 아니하는 신학은 의미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가 교회의 회개보다는 신학적인 자유주의 척결로 방향을 전환한 것은 두고두고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적 유감으로 남는다. 우리는 여기서 박형룡 박사가 아니라 고려파 선배들의 입장이 옳다고 확신한다.박 박사의 결별은 결국 당시 장로회 총회가 고신을 분리주의로 보고 축출시키는 데에도 상당하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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