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2-10 11:16
[나삼진목사의 고신역사 아카이브] 1. 한국 장로교 총회 신사참배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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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나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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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kosi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2772 [290]

다큐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1

한국장로교 총회 신사참배 결의


고신교회 70주년은 출옥성도들이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고 교회쇄신운동을 전개하면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단절된 후, 기구적인 치리회인 ‘대한예수교장로회총로회’ 발회(1952)에서 기산한다. 그러나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을 그 연원에서 출발하는 것이 마땅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1910년 한일합방으로 우리나라를 병탄한 일본제국주의의 야욕은 끝이 없었다.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어 총독은 행정, 입법, 사업, 군사권까지 장악하여 사실상 황제의 직위에 있었다. 삼일운동 후 일시적으로 문화정책을 펴기도 했지만, 식민지 지배가 길어지면서 1931년 만주사변으로 군국주의가 짙어지면서 식민지 지배정책도 가혹해졌다. 1937년에는 선전포고 없는 중일전쟁을 도발하였다. 일본의 침략야욕은 우리나라를 넘어 중국과 동남아시아까지 넘보게 되었다. 전쟁을 위해 내선일체를 주창하며 국가의 이념적 일치를 위해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우리나라를 병합한 일본이 신사를 한반도에 설치한 것은 그 역사가 훨씬 깊다. 삼일운동 이후 일제는 조선인들을 정신적으로 지배할 목적을 가지고 1925년 남산에 조선신궁을 건립하였고, 이는 조선 신사의 총본산이 되었다. 1936년에 경성 신사와 용두산 신사를 건립하였고, 미나미 지로가 제7대 총독(1936. 8-1942. 4)으로 부임하면서 그달 총독부령으로 ‘1읍면 1신사주의’ 원칙을 발표하여 도시는 물론 산간지방에 까지 신사를 세우게 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1937년 중일전쟁 개시 이후 신사참배 강요는 더욱 노골화하였다. 신사는 대동아공영권 건설과 황국신민화 교육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그동안 기독교학교에 신사참배가 강요되면서, 1937년에는 많은 남장로교회나 북장로교회가 설립한 많은 기독교학교들이 이에 저항해 문을 닫았다. 신사참배 강요에 기독교 각 교단도 굴복하기 시작했는데 천주교는 이전의 입장을 번복해 찬성으로 돌아섰고(1936), 감리교(1937)도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인정하고 찬성하였다. 마지막으로 장로교는 1938년 9월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

제27회 총회는 평양 서문밖교회당에서 개최되었다. 총대들은 사전에 총회에서 신사참배는 죄가 아니라고 찬성하든지, 총회에 가지만 신사참배 결의에 대해 침묵하든지, 총회에 참석하지 말든지를 선택하도록 강요되었다. 또 총대들의 해당 경찰서 형사들이 평복을 입고 총회장까지 동행하도록 했다.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당일 187명의 총대 사이에 97명의 형사들이 끼어 앉는 살벌함 분위기 속에서 개회되었다. 평양경찰서장은 전날 평양, 평서, 안주노회장을 불러, 평양노회장 박응률이 제안하고, 평서노회장 박임현이 동의하고 안주노회 총대 김길섭이 재청하는 신사참배 결의 각본을 전달하였고, 총회 이튿날 이러한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할 때 의장이 ‘예’를 묻고, 이어 ‘아니오’를 묻지 않고 발언할 기회도 주지 않자, 한부선 선교사는 부당한 회의 진행을 강력하게 항의하다가 경찰에 의해 회의장 밖으로 끌려 나가기도 했다.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성명서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또 이에 신사참배에 솔선여행하고 추히 국민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에서 총후 황국신민으로서 적성을 다하기로 함.
우를 성명함
소화 13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총회에서는 신사참배 즉시 특청에 의해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의 인솔로 전국 노회장단이 평양 신사에 참배했다. 선교사들은 이날 별도로 모여 모든 선교사 총대가 서명하여 총회에 제출하였지만, 경찰은 이를 회의록에 기록을 남기지 않도록 했다. 총회를 마치고 세 달이 지난 후 12월 12일 장로교 총회장 홍택기, 감리교 양주삼, 김종우, 성결교 이명직 등 한국교회 대표단이 이세신궁과 가시하라신궁에 참배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고, 신사 참배 후 기념 사진까지 남겼다. 그 무렵 다수의 기독교 문필가들도 신사참배에 협력하였는데, 홍병선 목사는 ‘기독교와 시국’에서 “조선기독교도는 황국신민으로 (국체명징, 국민정신 총동원, 총후후원, 정신작흥 등) 이상 제 행사를 충성스럽게 행하여야 할 것이요... 황국신민으로 국가의 선조를 숭배하고 신사참배 곧 예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했다(‘청년’ 1938년 11월호). 일제의 광기에 기독교 지도자들도 함께 춤을 춘 것이다.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이후 전국적으로 신사참배 강요의 수단이 되었고, 이를 반대하는 교회에 심각한 박해가 따라왔다. 우리 민족의 5천 년의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이 경술국치(1910. 8. 29)였다면,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역사는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에 대한 결의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하지 못하고 역사의식을 갖지 못할 때 이런 부끄러운 일에 동참하게 된다. 우리 시대는 또 다른 형태의 우상숭배가 강요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하고 역사의식으로 다시는 이런 부끄러운 일에 동참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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