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2-14 20:51
[나삼진목사의 고신역사 아카이브] 5. 한상동과 박윤선의 만남, 진해 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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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나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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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5. 한상동과 박윤선의 만남, 진해 신학강좌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면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위난의 때 한국장로교회에는 주기철(1897), 박형룡(1897), 한경직(1902), 한상동(1901), 김재준(1901), 손양원(1902) 등의 걸출한 인물들이 태어났다. 이들가운데 주기철과 손양원은 순교자로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였고, 다른 인물들은 장로교 합동측, 통합측, 고신측, 기장측의 핵심인물이 되어 반세기 동안 한국교회에 특별한 공헌을 했다.

한상동 목사는 주기철, 손양원 목사와 부산경남의 동향일뿐아니라, 깊은 신앙적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주기철 목사가 문창교회를 목회하다가 평양 산정현교회로 떠나면서 한상동 목사를 추천하여 그의 후임이 되었고, 주기철 목사가 순교한 후에 한상동 목사는 해방 후 산정현교회에서 다시 그의 후임이 되면서 순교자 주기철 목사를 이을 한국교회 지도자로 공인된 것과 같았다. 그러나 한상동 목사의 산정현교회 목회는 길지 않았는데, 공산당의 압박이 거세어진 것과 모친의 별세로 인해 남하하였기 때문이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에서도 그러했지만 한상동 목사는 산정현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정치적인 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해방 후 기독교정당을 창당한 한경직 목사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당시 북한의 초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국가 수반)을 지낸 김두봉은 김차숙 여사의 부친 김두천과 사촌지간으로 한상동 목사의 처당숙이었고, 그의 사무실에 방문해 만난 적이 있었지만,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성도들에게 설교와 목회로 강한 신앙적인 영향을 미쳤다.

감리교회 출신이었던 장기려 박사는 일제강점기 교회가 신사참배를 할 때 교회를 출석하지 않고 가정예배를 드렸지만, 해방 후 산정현교회에 출석하여 한 목사의 설교를 인상깊게 들었고, 한 목사는 담임목회자로서 그가 근무하는 병원에 심방을 하기도 했다(장기려 증언). 옥중에서부터 신학교 설립의 비전을 가졌던 한상동 목사는 해방 직후 평양을 방문한 만주 봉천신학교 교수 박형룡 박사에게 신학교 설립 의사를 타진하였지만, 그의 동의를 얻지 못해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해방 이듬해 첫 삼일운동 기념식(1946) 개최 과정에서 공산당이 주최하는 일에 북한의 교회들이 협조하지 않아 갈등이 일어났고, 1946년 11월 주일에 선거가 실시되면서 선거가 주일성수에 방해되기 때문에 교회가 정부에 협력하지 않았다. 한상동 목사는 그러던 중에 어머니 배봉애 여사의 별세 소식을 듣고 남하하였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쉽게 이해되지 않지만, 해방 후 남북한간 경계가 그리 심하지않아 1946년까지 일본과 중국에서 들어오는 동포들이 많았고, 이북에서 경계를 피해 월남하는 이들이 있었다.

한상동 목사는 1946년 3월 남하하여 모친을 잃은 슬픔을 달랬지만, 38선이 막혀 평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7월에 초량교회 위임목사 청빙을 받아 전에 시무한 바 있었던 초량교회를 시무하기 시작했다. 1946년 6월 남북의 분단으로 인해 남한의 교회만으로 구성된 남부총회가 자유주의신학을 가르치던 조선신학교를 직영신학교로 결의하면서 개혁주의 신학교 설립은 급물살을 탔다.

한편 봉천신학교에서 가르치던 박윤선 목사는 전쟁이 끝나자 8월 27일 봉천을 떠나 고향 철산에 잠시 머물며 목회하다가 공산당 체제가 강화되면서 이듬해 3월 1일 월남하였다. 박윤선 목사가 서울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한 한상동 목사는 그를 방문해 신학교 설립에 합의했고, 경남노회 관할지역에 설립하기로 하였다.

한상동과 박윤선 두 사람의 만남은 한국교회사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홍치모 교수는 이 두 사람의 만남을 두고 한국교회사적인 만남이라고 하였다. 한상동 주남선 박윤선 세 목사는 신학교 설립에 합의하고, 진해교회를 담임하던 강주선 목사의 협조로 교실과 기숙사를 준비하였다. 진해 신학강좌는 오늘날 학점을 받는 썸머스쿨과도 같았는데, 6월 13일부터 8월 10일까지 두 달 동안 모두 63명이 참가하여 신학을 위한 준비를 했다. 이들 중 다수는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투옥된 일이 있거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교역에서 인퇴하였던 이들이었다. 박윤선 목사는 이 신학강좌를 한상동 목사와 자신이 담당했다고 했는데, 성서신학, 조직신학, 창세기, 시편, 로마서, 히브리서, 계시록 등 일곱 과목이 강의되었다.

진해 신학강좌는 가르치는 박윤선도, 배우는 학생들도 해방이후 배움의 욕구가 절실한 상황에서 장엄한 출정식과 같았고, 수료한 이들은 대부분 고려신학교 개교 때 입학, 향후 고신교회의 주류로 편입되었다. 이상규 교수는 진해 신학강좌의 신학적 의미에 대해 ‘개혁주의 신학운동’이라고 규정하였다.

한상동 목사나 주남선 목사가 평양 옥중에서 해방 이후의 한국교회를 생각하며 신학교 설립을 위해 기도했지만, 신학교육은 그들의 의지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신학교 설립에는 신학을 책임지고 가르칠 수 있는 신학자가 필요했고, 일제강점기에 만주의 신학교에서 가르친 경험에 비추어 신학자 박윤선에게는 마음놓고 가르칠 수 있는 교실이 필요하였다. 그는 신학의 경향상 당시 국내 유일의 조선신학교에서는 가르칠 수는 없었고, 국내에서 아직 신학교 설립에 대한 움직임이 없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한상동 목사와 함께 신학교 설립에 합의했다. 이는 박윤선 교수로서는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한상동 목사에 대한 깊은 존경심은 물론, 신사참배 강요가 극에 달했던 시기에, 당국의 묵인 아래 자신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지만,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하는 것을 보고 만류하지 못하고 가르쳐야 했던 통한도 작용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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