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4-06 23:40
[나삼진목사의 고신역사 아카이브] 20. 비저너리 한명동 목사와 기독교 대학 ‘칼빈학원’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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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나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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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20. 비저너리 한명동 목사와 기독교 대학 ‘칼빈학원’의 꿈


시인 심군식 목사는 한명동 목사 90세 생신 송시에서 “출애굽 역사에서/모세와 아론이 있었듯이/고신의 출범에서/새천년 오늘까지/역사의 줄기마다/은초롱 등불을 켜 놓으신/목사님이 계셨습니다”라고 노래했다. 한명동 목사는 해방 후 형 한상동 목사가 중심이 된 한국교회 쇄신운동의 황량한 들판에서 고신교회의 역사를 일군 큰 인물이었다.

한명동 목사(1909-2001) 고신교회에서 늘 한상동 목사의 그늘에 가리워 있었지만, 그의 비전은 남달리 컸고, 웅대하였다. 두 형제는 성격상 차이가 있었지만 서로에게 ‘또 다른 나’였다. 조영진 여사(이근삼 박사 부인)는 “두 형제가 만나도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심전심 마음이 통해 서로의 생각을 읽었다”고 했다. 그는 한상동 목사의 마음과 생각을 읽고, 이를 구체화시키는데 그의 모든 힘을 쏟았다. 형이 하나님을 향한 불굴의 신앙과 깊은 경건의 소유자였다면, 동생은 그 신앙과 경건을 고신교회에 현실화시키고, 내면화시킨 비저너리였다.

고신교회 초기 역사에서 한명동 목사는 몇 가지 큰 족적을 남겼다. 먼저, 고려신학교 광복동 시절 기숙사형 고려신학교의 학생 관리를 위해 안정된 영도교회를 사면하고 부산남교회를 개척하였고, 기숙사 관리로 학생들의 경건훈련을 책임졌다. 그래서 MP라 불렀다.

둘째, 부산남교회를 개척하고 대형교회당 건축으로 고신교회 첫 30년 동안 본부와 같이 사용했다. 그가 목회하는 동안 총회 29회 중 17회, SFC 수양회 29회 중 16회를 개최했고, 수많은 집회가 있어서 고신인들 가운데 부산남교회 집회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셋째, 그는 해방 후 대한교회를 새롭게 하기위해 자라나는 학생들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한 자발적인 학생모임은 학생신앙협조회가 되었고, 그의 사택에서 기도하며 교회의 현실을 분석해 개혁방안을 마련했다. 또 한부선 선교사와 협력하여 고려신학교 청소년 수양회를 개최했는데, 이것이 학생신앙협조회, YFC와 하나가 되어 학생신앙운동(SFC)이 되었다. 그는 SFC의 강령을 제정, 학생들이 ‘개혁주의 신앙의 대한교회 건설과 국가와 학원의 복음화’, ‘개혁주의 세계교회 건설과 세계의 복음화’를 꿈꾸며 외치게 했다. 그의 사택은 학생들에게 늘 열려있었는데, 그의 60대 중반 때 필자가 부산시고교SFC연합회 사무간사(1975)로 손창우 안민 등의 임원들과 함께 주일 새벽 마다 기도와 회의를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넷째, 그는 고려신학교 송도교사를 마련하고 헌금을 독려하고 공사가 잘 진행될 수 앞장 섰다. 1954년에 부지를 마련하고 공사를 시작해 1956년 새학기에 이사했고, 1980년대까지 고신교회의 성지와 같았는데, 송도캠퍼스는 지금 의과대학과 부속병원, 간호대가 사용하고 있다.

다섯째, 그는 김영진 선교사를 대만에 파송한 이래 고신교회의 선교에 독보적인 위치에서 봉사했다. 각 교회도 총회도 사무실을 두지 못했던 때에, 교회사무실을 총회선교부 사무실로 함께 사용하게 했으며, 대만 선교사업 지원에 앞장서 제13회(환원) 총회(1963)부터 무려 18년 동안 총회선교부장으로 봉사했다. 중간에 3년간 다른 이가 선교부장을 했지만, 선교사 지원이 원활하지 못해 그가 다시 맡아야 했고, 은퇴 후 1983년까지 봉사하였다. 당시는 선교 참여교회가 적고 헌금 조달이 어려워 그의 교회에서 선교비를 지불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한명동 목사의 생애 가장 큰 비전은 기독교대학이었다. 그는 고려신학교가 예과 2년 본과 3년의 신학교육과정으로는 앞으로의 시대를 이끌고 갈 지도자로서는 부족하다고 보고, 어학과 인문과 철학에 강조를 두는 ‘칼빈학원’을 설립했다. 칼빈의 제네바 아카데미를 모델로 해 기독교 인문교육을 철저히 하도록 길을 연 것이었다.

‘칼빈대학’이라 불렸던 칼빈학원은 1955년 고려신학교 예과 2학년이 3학년으로 진급하는 형식이었다. 한명동 목사가 원장으로, 김진홍, 장석인 두 전임교수가 있었고, 조용석, 김도환, 이정복, 조용석 한부선, 한가태 선교사 부부, 마두원 선교사 부부가 함께 했고, 이근삼 박사가 원장이던 때는 차영배, 김진경, 김영재 등도 가르쳤다.

칼빈학원이 설립된 후 부산대 국문학과를 다니던 석원태가 정부 인가도 없는 학교에 편입하였고, 숭실대 등에서 편입한 학생들도 있었다. 교육과정에서 영어, 독일어, 헬라어 등의 외국어 공부에 열심하였고, 그러한 탄탄한 준비로 김의환, 허순길, 석원태, 유환준 등 유수한 학자, 목회자, 선교사, 여성 지도자들이 배출되었다.

칼빈학원은 1956년 4월에는 신학과 외에 영문과와 철학과를 신설해 오늘날 주목되는 인문학 교육으로 목회자 양성의 기준을 높인 것에 큰 의의가 있다. 고신, 장신, 총신이 모두 예과 2년 본과 3년의 학제를 유지했는데, 칼빈학원은 대학 4년 과정을 시작한 것이었다. 한신대, 감신대, 침신대, 서울신대 등이 1980년대 초반에야 대학원 과정을 목사 임직의 필수과정으로 도입한 것을 고려하면 우수한 목회자 양성을 위한 그의 비전은 시대를 크게 앞서가는 것이었다.

칼빈학원은 감천 영국군 주둔지를 불하받아 사용했는데, 그 과정에서 중앙대 설립자 임영신과의 재산분규가 발생하였고, 대법원에서 승소까지 하였지만 교묘한 방식으로 재산이 중앙대 임영신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임영신은 이승만 정부의 초대 상공부장관을 지낸 여걸로, ‘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허순길) 몇 곳에서 김영신으로 표기하는데, 저자의 오해이다.

이사장 한상동 목사는 칼빈학원 부지에 대해 관계기관에 여러 차례 진정서를 내었지만,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다. 칼빈학원은 감천부지를 잃으면서 기독교대학의 꿈을 접어야 했는데, 고려신학교와 칼빈학원 교수 연석회의에서 “고려신학교가 칼빈학원을 흡수하여 고신대학(인문계 단과대학) 설치, 대학원 인가 때까지 고려신학교는 현행 유지, 1964년부터 암남동에서 교수할 수 있는 제반 시설 준비, 교무와 행정 단일화”를 결정, 1965년 고려신학교에 병합되었다.

칼빈학원의 기독교대학의 이상은 고신대학교로 발전하였고, 대학은 개교 50주년에 첫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한명동 목사에게 수여했고, 그의 90회 생신을 맞아 기념문집을 헌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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