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8-30 23:27
[나삼진목사의 고신역사 아카이브] 40. 의예과 인가와 의과대학, 고신의료원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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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나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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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40. 의예과 인가와 의과대학, 고신의료원 설치

한국전쟁 기간에 자선병원으로 출발한 복음병원은 장기려 박사와 의료진들의 헌신으로 오랫동안 월 1회 농어촌 의료 봉사를 실시하였다. 1968년 3월 개교한 복음병원부속간호학교(현 고신대 간호대학)의 간호교육으로 학생들은 초대교장 장기려 박사의 신앙적, 인격적 감화를 받아 자긍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기독간호사의 꿈을 키워갔다. 고려대 의대 출신으로 부산복음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를 거쳐 교수를 지냈던 안양샘병원 미션원장이자 아프리카미래재단 박상은 대표는 장기려 박사에게서 전인치유, 생명사랑, 의료선교 등 세 가지 사상을 배워 이후의 삶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했다.

장기려 박사가 정년 은퇴를 한 후 박영훈 원장 체제가 된 후 암병동 완공과 1977년 3월 22일 보건사회부로부터 종합병원의 승격이 이루어면서 의학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박영훈 원장의 이같은 계획과 이근삼 박사의 기독교대학에 대한 비전이 하나가 되어 의료선교사 양성을 명분으로 의예과 추진이 구체화되었다.

당시는 의과대학 수요가 필요한데다가 부산에 부산대 밖에는 의과대학이 없던 시기였다. 서울에 의과대학이 8개 대학이 있었고, 부산보다 작은 도시 대구와 광주에 2개 대학에 의과대학이 있었지만, 부산은 인구 350만 명의 제2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부산대 의과대학만 있어 의과대학의 추가 설립은 부산의료계의 열망이기도 했다.

당시 고신대학과 교단 안에서 의예과 신설에 대한 의견의 통일된 의견을 갖지 못하였는데, 미국과 유럽의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던 이근삼 교수는 개혁주의 문화관의 입장에서 각 분야의 지도자를 양성하여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미국에서 신학교에서만 공부하였던 오병세 교수는 신학교육 만을 교회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사회는 의예과가 신설을 고려해 고려신학대학(본과)와 고신대학으로 분리를 가결하고 제28회 총회에 제출하였으나 총회에서 부결되었다. 제29회 총회(1979)는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회 보고로 의과대학 설립에 대한 건의가 있었는데, 총회는 박영훈 원장의 설명을 듣고, “의과대학 설립 추진 건은 현 고려신학대학을 개편하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하고, 현 이사회와 각 노회에서 대표 1인씩을 파송하여 함께 협력연구 추진키로” 결의했다. 총회의 결의에 따라 각 노회는 바로 대표를 선출하여 보고했다.

당시 문교부로서는 부산지역 의료인력 양성이 절실했던 때에 의대 신설에 대한 공감대가 이루어졌고, 복음병원의 역사나 규모로 보아 유력한 후보군에 속했으므로, 교육부는 인가를 고려하였다. 그런데 학교법인 고려학원에 실습병원 복음병원이 있어 의예과 인가 요건이 충족되었지만, 고려신학대학에 의예과를 신설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교명의 변경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문교부는 의예과 설치 인가를 내정한 후, 최종 인가 전에 학교법인에 “고려신학대학이라는 이름으로는 의예과 인가가 부적당하므로 교명을 변경하는 것이 좋겠다”는 연락을 해왔고, 대학에서는 이사장 박창환 목사가 외국에 출타중이어서 이사회 소집이 불가능하고 응답하였다. 문교부로서는 이사회 결의를 대신하여 ‘학장 의견서’ 제출을 요구해, 이근삼 학장의 의견서(사진 3)를 근거로 의예과 설치를 인가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80년 10월 2일 의예과가 신설되었고, 11월 3일에는 신학대학원 인가도 함께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 청와대 민원수석(현 민정수석) 비서관을 지내고 이후 5년간 한국방송공사장으로 있던 이원홍, 문교부장관 이규호 등 고신교회 출신 인사들의 협력도 적지 않았다.

제30회 총회에서는 총회의 처음 결의와 달리 교명이 변경된 것에 대해 학장이 사과했을 때, 박수로 받아 사실상 이를 환영했고, 총대들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한 달 후 신학대학원 인가도 이어 함께 이루어졌다. 한 포럼에서 고신 역사 60주년을 정리하는 몇 차례 세미나를 갖고, 그 연구 결과를 모은 책을 출간하면서 의예과 신설과정을 “학장 도장 도용”사건으로 규정하지만, 이렇게 사실과 다르다.

의예과 신설과정에 여러 차례 우여곡절이 있었고, 의예과 인가 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의예과가 설치된 후 병원과 의예과와 복음간호대학의 연계를 위해 1981년 3월 1일 고신의료원이 설치되었고, 박영훈 의학부장이 초대 의료원장이 되었다. 고신의료원은 의예과 설치와 함께 300병상을, 1983년에 다시 350병상을 허가받았다. 복음병원은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였다.

재정적 여건이 충분하지 않은 가운데 의예과가 설치되어 유능한 교수의 초빙은 물론 학습 여건이 충분히 조성되지 않아 학생들의 불만이 많았다. 의료선교사 지망생들은 헌신적으로 신앙훈련을 받았지만, 신앙이 없던 학생들에게 신설 대학이라는 낮은 자존감에 당연히 다른 의과대학과 비교가 되었을 것이고, 아직 남아있던 신학교의 경직된 학내 분위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을 것이다. 의예과 설치 후 의예과 학생들이 의학과에 올라가면서 해를 달리하며 학생이 증가하여 학습환경이 열악해지고 있던 신학대학원의 불만도 점차 고조되어 갔다.

의예과가 신설된 후 고려학원 이사회는 대학 본부, 신학대학원,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으로 세 구분하여 행정이 독자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해 대학은 ‘한 지붕 세 가족’이 되었다. 이것은 대학, 신학대학원, 병원 등 각 기관의 독자성을 배려한 측면이 있었지만, 달리 생각하면 의과대학이나 복음병원에 고신대학의 역사와 정신, 신앙과 신학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하는 신학과나 신학대학원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 지나친 행정, 재정, 인사의 분리는 고신대 신학과와 신학대학원의 인적교류가 불가능하게 되어, 인적 자원의 낭비, 신학 7년 연계 교육과정의 무산 등의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어느 기관이나 대학도 규모가 확장되고 구성원들이 다양해지면 이념적인 통일성을 강화해야 하는데, 그러한 행정구분은 이를 일찌감치 포기한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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