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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를 따르는 '베끼기의 달인들'


칼빈주의를 따르는 '베끼기의 달인들'
김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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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3.07

▲ 김태길 목사

고려신학대학원

탈봇신학대학원 박사과정

성안교회 유학목사

"매일 하는 설교가 이렇게도 결실이 적은 것을 생각하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위의 말이 이제 막 교회개척을 시작한 풋내기 목사가 고작 단 두 명의 성도를 앉혀 놓고 새벽기도를 마친 후에 괴로운 심정을 토로한 자기 하소연쯤으로 생각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그리도 존경하고 닮고 싶어하는 칼빈의 말이다. 혹자는 이걸 두고, 천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할 천재 신학자가 "난 여전히 배고프다."라는 식의 얄미운 푸념 정도로 받아 드릴 수 도 있을 것이다. 왜 학창시절 반에서 늘 1등 하는 친구가 기말고사치고 나면, "이번 시험 망쳤다." 고 엄살을 부리고선, 어김없이 1등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면서 주변 친구들에게 온갖 눈총을 받던 '범생이'들이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분명 칼빈은 엄살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근삼 박사가 그의 책 [칼빈과 칼빈주의]에서 칼빈 같은 대 설교자에게도 많은 교인들이 권태증을 느끼고 감격 없는 교회생활에 빠져갔으며, 이 사실이 칼빈을 심히 괴롭혔다고 묘사한다. 이쯤 되면 "하나님은 참 공평하시지"라고 하면서 위안을 삼을 설교자들이 꽤 있을 듯 싶다. 그러나 더 큰 위안이 될 설교자가 또 있다. 그분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시다. 오늘날 모든 설교학 박사 논문에 하나같이 예수님을 가장 완벽한 설교자의 모델이라고 소개하는 것만 봐도 그는 칼빈보다는 설교에 있어서 한 참 고수시다.

예수님은 부흥집회 전단지 한번 돌리지 않고도, 산과 들판에 장정만 오 천명 이상이 모여 설교를 듣게 할 정도로 당대 최고의 유명 설교자셨다. 청중들은 내리쬐는 중동의 뜨거운 햇볕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라," "오리를 가자 거든 십리를 가주라." 같은 류의 설교를 듣고 있었다. 예수님의 설교가 도대체 어느 정도였길래, 그늘도 없고 오늘날 같은 썬크림 하나 바르지 않고도 그 많은 사람들이 땡볕에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있도록 했을까? 게다가 날이 어둑 어둑 해 질 때까지 그 수많은 사람들이 배를 쫄쫄 굶고서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을 정도였으니 과연 예수님의 설교는 육의 음식보다 더 배부르게 하는 신비한 능력이 있었나 보다.그런데 예수님의 설교라면 배고픈 줄도 모르고 열성적이든 그들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예수님의 설교 광팬을 자처하던 그들 중 다수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라."라고 외쳐대는 성난 군중으로 돌변했다. 그리고 그 군중에 끼이지도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둥이 풀린 콩자루의 콩들마냥 다 흩어지고 말았다. 예수님의 살았을 적, 설교의 결실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칼빈이 했던 고민은 고민도 아니었다. 적어도 칼빈은 자기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로부터 사형언도를 받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칼빈이 예수님과 아주 닮은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그의 설교가 그의 사후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많이 비슷하다. 칼빈은 알려진대로 그의 전속 속기사를 통해서 2,000편이 넘는 설교를 기록하게 했다. 그러나 칼빈은 당시에 흥황을 이루던 인쇄술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설교가 출판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수많은 자신의 설교들 중 단 몇 편만이 그가 살아 있을 때 출판되었는데, 그것도 동료들의 성화에 이기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대부분의 설교는 그가 죽고 난후에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출판되었고, 오늘날 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박영돈 교수가 그의 책 [일그러진 한국교회의 얼굴]에서 지적한 것 처럼, 저명한 신학교 교수들도 평생 몇 권의 역작을 위해서 심혈을 기울이는데, 지식도 경험도 일천한 목회자들이 수십 권의 책을 쓰면서 업적 위주의 시류에 편승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만약 박영돈 교수의 말처럼 준비되지도 않은 사람이 자신의 설교집을 수십권씩 펴내는 이가 있다면, 칼빈이 자신의 설교를 출판하지 않겠다고 한 이유를 듣게 되는 순간 부끄러운 맘이 들 것이다.

칼빈은 "자신의 설교는 자신의 교회의 회중만을 위해서 한 것이므로, 다시 말하면 설교는 자신의 목회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공개할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근삼, 72)

칼빈이 자신의 설교를 출판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재정적인 문제나 기술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청중의 콘텍스트에 관한 문제였다. 이것은 로이드 존스가 "아무리 최고의 설교라도 그것을 다른 곳에서 다시 하게 될 때 결코 그런 감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목사와 설교, 390)라고 했던 말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럼 칼빈의 말을 좀더 확대해서 해석해 보자.칼빈의 설교론은 철저히 자신의 목양지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칼빈의 설교는 자신이 돌보는 양들을 위해서 '최적화'된 설교라는 의미이다. 좀더 나아가서 그는 혹, 다른 설교자들이 자신의 설교를 그대로 또는 비슷한 방식으로 하는 것에 대해 경계했다고도 볼 수 있다. 칼빈의 신학과 설교의 대가 파커(T.H.L. Parker)는 칼빈이 생각하는 설교자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설교자는 의사며, 최고 권위자(magister), 선생인데, 그것은 설교자 자신이 목회하는 특정 교회(his own particular Church)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설교자는 성경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the preacher's own view of scripture)을 가져야 한다."(Calvin's Preaching,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2, 36)

다시 요약해 보면 이렇다. "설교자란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에 관한 최고의 가르침과 처방을 줄 수 있는 말씀의 권위자이며, 설교자는 자신만의 성경에 대한 시각을 가져야 한다."

계속적으로 필자가 집중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감지했는가?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라는 측면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설교자의 가장 우선해야 할 대상은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라는 것을 전제한다. 간혹 교인들은 '설교 외식'을 좋아하기도 한다. 그러나 설교를 은혜스럽게 전한다는 목회자들의 교회를 한번 들여다 보라. 그런 교회의 교인들의 특징은 '설교 외식'을 썩 그리 반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집에서 해 주는 엄마의 음식이 너무 맛있는데, 누가 굳이 '돈 써가며' 외식을 하겠는가?

그런데 만약 교인들의 마음은, 자기 목회자의 잘 요리된 영적 양식을 먹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데, 그 목회자가 자꾸 다른 사람이 만든 '음식'을 가져다 와서 먹인다면 어찌 되겠는가? 게다가 그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든지, 심지어 자신이 기도하고 노력해서 만든 것처럼 행세한다면 이것이 상식적인 일인가? 이 문제는, 옆집 호박을 몰래 따다가 호박전을 부쳐먹는다는 식의 도덕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의 핵심은, 설교자가 자신의 도리를 다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한명의 설교자가 탄생하기까지 어떤 교육을 받는가? 신학대학원 3년간만을 살펴보더라도, 각 교단마다 거의 100학점을 이수해야 졸업을 하게 된다. 이수과목에는 구약학, 신약학, 교의학(조직신학), 역사신학, 설교학, 성경원어 등이 필수과목이다. 이 모든 과목이 왜 필요하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함이다.다른 말로 하면, 설교를 하기 위해서 이 모든 과목을 공부한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이근삼 박사 또한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에 봉사하는 것이다."(칼빈과 칼빈주의,74)라고 밝히고 있다.이렇게 설교를 위한 신학 전문교육을 받고서도, 설교자가 맨 먼저 성경을 펴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에 널린 설교문들을 이리저리 주워 모으고서는 그것을 열심히 묵상하고 있다면, 차라리 신학대학원에 '인터넷 설교학개론' '인터넷 설교리서치 방법론' 같은 것들로 교육받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요즘 한국 기독교계에는 '베끼기의 달인'들로 인해 시끄럽다. 그들은 차라리 구약시대의 성경필사자로 태어났더라면 그 능력과 재주를 인정받았을 것을, 스스로를 칼빈의 후예로 자처하는 보수교단들이 설교 라이선스를 주고, 목사 안수까지 준 사람들인지라 그냥 한 개인의 문제로만 봐 넘기기엔 너무 중대한 사안인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신학교 설교학 수업에서 해법을 찾고자 할 지 모른다. 또 어떤 이들은 총회신학부의 강도사 인허 면접에서 해법을 찾고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을 두고 노회법으로 엄격히 다루자는 부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어떤 방법론보다는 설교자의 자세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말씀에 대한 실력을 쌓자. 실력을 쌓는다는 것은 IQ(Intelligence Quotient, 지능지수)의 문제가 아니라, PQ(Practical and Physical Quotient, 신체훈련지수)SQ(Spiritual Quotient, 영성지수)에 관한 문제다. 다른 말로 하면, 설교자의 실력은 두뇌로 쌓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이와 영성으로 쌓는 것이다. '엉덩이'는 얼마나 오래 앉아서 연마하느냐를 일컫는 시쳇말임을 눈치챘을 것이다. 요즘 목회자들도 건강바람이 불어서 운동 하나씩은 다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PQ는 신체단련을 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어떤 능력을 쌓기 위해 신체를 '혹사'시키라는 말에 더 가깝다. 그런데 요즘 많은 목사들이 자신의 신체단련에는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면서, 정작 의자에 앉아 있질 않는다. 한국 목회자가 세상에서 가장 바쁜 목사라고 서양 학자들의 책들에서도 비아냥 거리는 걸 보면, 의자에 앉을 시간이 있는 목사가 이상할 판이다. 그러나 성경은,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다."(딤전4:8)라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그러면서 딤전4:13에서 아주 더 분명히 명령한다. "성경을 읽는 일과 권면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라." 설교자가 실력을 쌓는 일은 '말씀에 전념'할 때 가능한 일이다.

몇 년 전 [목회와 신학]편집부에서 578명의 한국 목사에게 물었다. "설교자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단수응답)" 이에 364(63%)'개인의 영성 및 경건생활'이라고 답했다. 그 다음 이어 154(26.7%)'본문 해석능력'이라고 답했다.(한국교회설교분석,두란노아카데미,2009.33). 한국교회 설교자의 90 퍼센트는 '영성 및 성경해석 능력'이 설교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격이라고 답한 셈이다. 그런데 질문 한가지 더 살펴보자. "귀하의 설교 사역에서 가장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은 무엇입니까?(단수응답)" 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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