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6-08 07:13
3) 2000년 기독교 교회사에 나타난 주요 사건 열전 - 예루살렘 멸망 (AD 70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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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Henry Park
조회 : 2,868  


   3. 예루살렘의 멸망 (AD 70년 경)

티투스의 예루살렘 함락 개선식 벽화(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한 촛대가 보인다)


로마의 지배에 항거하여 일어난 첫 번째 유대 독립 전쟁(66-74년)에 관해 보도하는 중요한 자료는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 37/38-100년 이후?)이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던 유력한 제사장 가문 출신이며 하스몬 왕가와도

친척 관계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의 의뢰에 따라 “유대전쟁기”(Bellum Judaicum)를 저술하였다.

물론 이 작품이 로마인의 시각을 쫓는 일종의 선전문학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나, 요세푸스는 전쟁 초기에 갈릴리    

지방의 군 지휘자로서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보도는 신빙성이 높다고 말할 수 있다.

전쟁은 당시 로마 총독 게시우스 플로루스가 주후 66년 4/5월에 예루살렘 성전 금고를 약탈함으로써 시작되고, 이내

로마의 통치에 항거하는 대대적인 해방 운동으로 확산된다.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아들 엘르아살이 성전에서 로마

황제를 위해 드리던 제사를 중지시키는 사건이 일어난다(예루살렘 성전에서 로마 황제를 위한 예배로 인하여

유대교는 로마제국 내에서 인정받는 300여 종교들 중에서 공식 인정받는 종교들 중 하나로 된다) . 이것은 예루살렘

 제의 공동체가 로마 통치자와의 공적으로 결별을 선언한 중대 사건이고, 로마의 지배에 항거하는 결정적인 봉기의

순간을 뜻한다.

 

먼저 예루살렘의 유대인 내부에  권력 투쟁이 발생한다. 이른바 평화주의자들인 대제사장과 바리새파 및 헤롯 당원

들이 하나가 되어 열심당원들과 각축전을 벌이나, 결국 봉기를 일으킨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로마군에 공격을

가한다. 반란군들은 여러 성곽 뿐만 아니라 시 문서보관실에 침입하여 빚 문서들을 불사른다. 이로써 수많은 빚진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 부자들에게 항거하도록 부추겼다고 요세푸스는 보도한다. 여기에서          

유대전쟁에 담겨 있는 사회적 동인도 엿볼 수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전 수비를 위해 로마군이 지키던 안토니아  

요새와 헤롯 왕궁이 열심당원들의 수중에 넘어간다. 또한 메나헴이 열심당원들에게 가세하자 반란군의 사기는 더욱

고무된다. 요세푸스는 메나헴이 “마치 왕처럼” 예루살렘에 입성했다고 보도한다. 메나헴과 관련된 메시아 기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메나헴은 헤롯 왕궁의 통치권을 넘겨 받는다. 아그립바 왕의 수비대는 항복을 하고, 로마 군대는

주변 성곽으로 후퇴한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살해되고, 살려 주겠다는 조건에 항복한 로마군인들도 무참히          

살해된다. 그런데 아나니아의 살해로 인해 열심당원들 사이에 균열이 생기면서 대제사장의 아들 엘르아살은          

메나헴과 갈라선다. 어느 날 메나헴이 보석으로 치장된 왕의 옷차림을 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성전 예배에 들어서자,

엘르아살의 한 추종자가 그를 살해한다. 메나헴의 추종자들은 마사다로  퇴각한다. 그동안 로마는 시리아의 행정장관

갈루스를 우두머리로 하는 제12군단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반란을 진압하고자 했으나, 벳 호론 근처에서 유대인들의

매복 공격에 말려들어 철저히 괴멸된 상태에서 시리아로 퇴각한다.


 이 승리로 인해 전쟁에 회의적이었던 유대인들도 전쟁에 급속히 빨려 들었고, 반란군은 로마에 대한 승리에 들뜨게

된다. 이제 대제사장과 바리새파가 주동이 되어 곧 밀려올 로마군의 대 반격에 대비하여 반란군을 조직적으로

규합한다. 그리하여 각 지방으로 지휘관들을 보내게 되는데, 유대 역사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요세푸스를 갈릴리

지방의 지휘관으로 파송한다. 네로 황제는 용장 베스파시안을 파병하여 반란군을 진압하고자 한다. 베스파시안은  

아들 티투스와 함께 67년 초에 대략 6만 명으로 구성된 강력한 세 군단(제5, 제10, 제15군단)을 이끌고 시리아에서  

갈릴리로 진격한다. 47일간 갈릴리를 고수하던 요세푸스는 결국 로마군의 기세에 눌려 67년 6~7월에 항복한다. 이때

요세푸스와 함께 갈릴리를 지키던 열심당의 지도자 기샬라의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탈출하고, 요세푸스는 로마로  

전향하여 살아남는다. 요세푸스의  보도에 따르면, 자신이 살아남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으며, 베스파시안이    

로마 황제가 되리라는 자기의 예언이 적중한 것으로 돌린다. 67년 말 갈릴리 지방 전체가 로마군의 수중에 떨어진다.

로마군은 이어서 예루살렘으로 진격한다. 당시 예루살렘은 유대인 사이의 내전으로 혼란에 처해 있었다. 갈릴리에서

탈출한 기샬라의 요한을 중심으로 열심당의 극단주의파가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친 로마적이며      

중도적 입장을 취하고 있던 예루살렘 지배층을 살해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대제사장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대제사장을 세운다. 그 사이에 베스파시안은 베레아와 인근 유대지방의 중심 지역을 점령한다. 그 무렵 네로 황제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68년 6월 9일), 로마의 불안한 정세 때문에 일단 전쟁을 멈추고 사태를 관망한다. 유대  

반란군은 이러한 정세를 이용하지 못하고 새로운 내전에 휩싸인다. 기샬라의  요한이 성전 지역을 장악한 반면, 또  

다른 과격한 열심당 지도자인 시몬 바르가 예루살렘의 나머지 지역과 이두메 지역을 지배한다. 과격한 두 유대

지도자들이 격렬한 내전을 벌이는 동안, 원시 기독교 공동체는 예루살렘을 떠나 동부 요르단 지방에 있는 페트라로

피신한다.

 

69년 7월 1일에 알렉산드리아에 머물고 있던 베스파시안이 이집트 주둔 군단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고, 로마 제국

동부  지역도 그를 황제로 인정한다. 제국의 판도를 쥔 베스파시안은 70년에 아들 티투스를 이집트에서 예루살렘으로

보낸다.  티투스는 네 개의 군단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한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서로 다투던 세력들은        

내전을 멈추고 로마군의 공격에 함께 격렬히 대항한다. 로마군은 예루살렘 거주민들을 아사시킬 목적으로 도시 

주변에 돌 벽을 쌓아 외부로부터의 식량 유입을 철저히 봉쇄한다. 당시 절박한 상황을 예수님이 예언한 말씀을 통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 하리니...”(개역 한글판, 눅 19:43-44).                    

안토니아 요새가 70년 7월 말에 점령되고, 성전에서  날마다 드리던 제사가 8월 6일로 중단되며, 마침내 7월 말에  

성전이 로마군에 의해 점령되어 불에 탄다. 9월 초에 예루살렘 전역이 로마군에 장악되면서 수많은 거주민들이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혀가고 도시는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이로써 제2 성전시대가 막을 내린다. 그러나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이 세 개의 요새 (헤로데이온, 마케루스, 마사다)에 모여 최후의 항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티투스는 이곳의 점령을 유대 지방의 총독 루킬리우스 바수스에게 맡기고 로마로 돌아가서 아버지

베스파시안과 함께 전쟁 승리의 축제를 연다. 헤로데이온과 마케루스는 곧장 항복하였으나, 난공불락의 천연 요새인

마사다는 열심당 지휘자인 엘르아살 벤 야이르를 주축으로 하여 격렬히 저항한다. 74년 4월에 새 총독 플라비우스가

마사다 서편에 토성을 쌓고 공성 망치로 공략하자, 더 이상 가망이 없음을 알고 유대 반란군 모두가 자결을 함으로써

마침내 점령되고 만다.


전쟁의 결과 

로마에 항거한 전쟁에 패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은 상당 부분 황폐화되었으며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다. 그와 함께  

전쟁은 정치적, 경제적 또한 종교적 영역에도 커다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1) 정치적 결과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팔레스타인은 제3등급에 속한 로마 영토로서 기사 계급 행정관 (procurator)의 지휘와 시리아

거주 총독의 감독을 받기는 하였으나 유대 분봉 왕의 지배 가운데 있었다. 하지만 전쟁 후 팔레스타인은 독립된 로마

지방이 되면서 제2등급의 로마 영토로 격상된다. 즉, “유대아”(Judaea)라는 라틴어 공식 이름 아래에 로마 집정관

(consul), 혹은 법무관 (praetor) 계급의 총독이 직접 다스리는 로마 영토로 바뀐다. 다시 말해, 속국의 형태 가운데  

부분적이나마 허용되었던 자치권이 완전히 소멸되고, 이제는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받는 땅으로 바뀌었음을 뜻한다.

한마디로, 지도 상에서 유대 국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즉, 1948년 독립할 때까지 유대인은 나라 없이 2천년 동안

유리 방황함으로 예수님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2) 경제적 결과                                                                                                                                                               유대전쟁은 팔레스타인 경제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물과 수공업 원료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상업과 교통도    

불리한  산악 도시인 예루살렘은 전쟁과 같은 위기상황을 겪을 시 커다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마련이다.          

전쟁으로 인해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유대 전역이 황폐화되고 수많은 유대인이 살해된다. 혹자는 팔레스타인 유대  

거주민 가운데 3분의 1이 죽었을 것으로 추산한다. 이와 같은 엄청난 손실과 더불어 유대 땅이 로마 황제의 개인

소유로 바뀌면서 팔레스타인의 유대 백성의 다수는 자신들의 경작지를 잃고 노예와 다름없는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로써 유대 백성의 경제적 삶은 피폐해진다. 또한 유대인의 디아스포라가 본격적으로 이루어 진다.


3) 종교적 결과                                                                                                                                                               전쟁은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유대인의 종교적 삶에도 엄청난 파국을 초래한다.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함으로써  

이를 중심으로 하는 유대인의 종교적 삶이 그 뿌리에서 부터 완전히 붕괴된다. 동시에 성전 제의의 구심점을 이루던 대제사장 직분이 완전히 소멸된다. 이제 유대인들은 성전세 대신에 로마에 소재한 쥬피터 카피톨리누스 신전에  

바치는 ‘피스쿠스 유다이쿠스’(fiscus Judaicus)라는 형태의 세금을 굴욕적으로 드려야만 했다. 이로써 성전 제도가

붕괴되었다는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전쟁으로 인해 예루살렘과 성전 외에도 유대교의 중심 자치 조직인 ‘산헤드린’ 공회가 소멸한다. 산헤드린은 70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조직으로 예루살렘에 소재한 유대 최고 재판소이며 행정기관이다. 최고 책임자인 대 제사장을 중심

으로 사두개파 귀족들이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바리새파 서기관뿐만 아니라 유대 공동체를 대표하는 장로들로  

구성되었다. 산헤드린의 중요 역할은 토라에 관한 민법적이며 제의법적인 해석과 적용, 재판권, 전쟁과 평화를        

결정하는 일, 성전 감시, 명절과 축제일과 관련된 종교적 실천 사항을 규정했다. 산헤드린의 소멸은 유대인의 자치  

정치조직의 붕괴를 뜻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핵심 구성원인 사두개파의 소멸을 뜻한다.예루살렘 교회와 관련하여

예루살렘 교인 중에 개인적으로 전쟁에 동참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으나, 예루살렘 교회(=원시 기독교

공동체)는 과격한 열심당원을 이끄는 메나헴과 같은 인물에 거는 정치적 메시아 대망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신앙을 가졌기에 전쟁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로마군의 임박한 공격에 처해 있으면서도 내전으로 얼룩진 예루살렘을 떠나 요르단

동편에 있는 페트라로 피신한 것으로 보인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는 자신의 <교회사> (제3권, 5,3)에서 예루살렘

멸망과 그리스도인들의 피신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마침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계시에 따라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그 도시를 떠나 페트라로 불리는 베레아의 한 도시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나고, 또한 동시에 그 거룩한 사도들이 유대인들의 수도와 온 유대 땅을 완전히 비웠을 때,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에게  범한 수많은 악행으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 이 불법자들을 인간사에서 완전히 멸절 시켰다.”  

여기에서 유세비우스는 예루살렘 멸망과 유대인들의 죽음을“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평하고 있다. 이어지는 진술

가운데  이 심판에 대해 더욱 분명히 말한다: “유대인들이 만민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에게 수난을 가한 바로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공의를 나타내셔서 멸망이 그들을 덮쳐 마치 감옥에 갇힌 듯이 그곳에 갇힌 것은 참으로 공정한

일이었다.” 이와 같은 유세비우스의 진술은 반 유대적 시각에서 내린 신학적 평가다.


유대교 회복 운동과 랍비 유대교의 출현 

유대전쟁은 팔레스타인 유대교에 대 참사를 초래하였으며, 그로 인해 유대교의 대 변혁을 이끌게 된다. 전쟁으로    

인해 당시 팔레스타인에 존재 했던 중요 종파인 사두개파와 에센파 및 열심당에 속한 사람들이 전멸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이들 종파는 커다란 피해를 보고 사실상 소멸되고 만다. 그러나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아 황폐화된

유대교 전통을 다시 추스를 수 있는 유일한 그룹이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온건한 노선을 따르던 바리새파였다.  

이들은 유대 종파 중 가장  많은 회원을 갖고 있었으며, 헤롯대왕 시대 이후 정치권과는 거리를 둔 민간 경건 운동을

주도했던 종파였기에 전쟁의 피해를 상대적으로 적게 입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훗날 이들은 ‘랍비’로 불리게  

되고, 나라와 성전이 없는 상태에서 유대교 회복을 위해 전면에 나선다.                                                                      


 예루살렘 성전 멸망 후 유대교 회복운동과  관련하여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요하난 벤    

차카이’이다. 랍비 요하난 벤 차카이를 주축으로 얍네/얌니아에서 일어난 유대교 회복 운동은 새로운  형태의          

유대교의 출현을 알린다. 그것은 더 이상 성전과 희생 제의에 의존하지 않고 이른바 ‘예쉬바’ (Yeshibah=토라 연구  

 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의 출현이다. 랍비 유대교 전통은 중세기를 거치는 가운데    

이른바 “정통 유대교”를 형성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대 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유대전쟁과      

예루살렘 성전 멸망은 새로운 형태의 유대교를 낳았을 뿐 만 아니라 향후 초기 교회의 발전에도 영향을 끼친다.      


전쟁이 끝난 후 예루살렘에 다시 기독교 공동체가 생겼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각 지역 교회 지도자들이 그

지역의 교회들을 선도하면서 해당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개별적인 선교 사역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유대인들은

전쟁에  동참하지 않았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더 이상 유대교에 속하는 무리로 간주하지 않고, 보다 확실히 다른

교단으로 간주하게 된다.


  예루살렘 멸망은 예수님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만이 아닌, 유대교 중심의 역사에서 기독교 역사로 변하는      

획기적인 , 팔레스타인 중심에서 세계로 뻗어가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사건이며, 결과론 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    

그대로 드러난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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