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6-14 07:09
5) 2000년 기독교 교회사에 나타난 주요 사건 열전 - 이그나티우스의 생애와 그의 글들(AD 107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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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Henry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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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그나티우스의 생애와 그의 글들

이그나티우스의 순교장면

 

 이그나티우스의 생애는 단편적인 전설로만 내려올 뿐 정확하게 기록된 것은 없다. 그의 이름 이그나티우스는 헬라어

 ‘이그나티오스’의 라틴식 이름 ‘이그나티우스(Ignatius)’이다. 학자들은 그가 유대인이 아닌 것을 감안하면 헬라식 이름인

‘이그나티오스’가 아니라 로마식 이름인 ‘이그나티우스’가 원 이름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름의 뜻은 ‘불 같이 뜨거운 사람’

이다. 순교에 대한 열정과 기독론(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뜨거운 신앙을 적절하게 보여주는 이름이다. 그는 모든 서신에서

자신을 ‘테오포로스’로 소개한다. ‘하나님을 지고 가는 자’란 뜻을 가지고 있다. ‘지고 간다’는 말은 자신 안에 하나님을 품고

있다는 뜻이 더 강하다.                                      

 그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전무하다. 사막의 성인으로 불리는 히에로니무스는 ‘이그나티우스가 젊었을 때 베드로와 바울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고, 사도 요한의 수제자’였다고 한다. 이것 역시 확실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초기 교부들의

진술은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상당히 권위 있는 감독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감독으로 있었던 안디옥 교회 감독의

시절도 침묵에 잠겨있다. 오리겐에 의하면 그는 베드로의 후계자였고, 유세비우스는 ‘안디옥 교회의 초대 감독이었던

에보디우스가 사망한 후 이그나티우스가 제2대 안디옥 감독’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이그나티우스는 동시대 그리스도

인들이 가졌던 순교의 열망과 사도의 전통을 지키려는 열정으로 가득 찬 인물이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을 증거 하였다는

이유로 로마로 압송되어 맹수형에 처해져 순교를 당하게 된다.

이그나티우스 순교 후 빌립보 교회의 신자들은 서머나 교회 감독으로 있던 폴리갑에게 이그나티우스의 편지들을 베껴서

보내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그 후 이그나티우스의 편지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면서 읽혀지게 된다.

 하나님을 증거 했다는 이유로 맹수형에 처하게 된 이그나티우스는 안디옥에서 체포되어 열 명의 군인의 감시를 받으며

로마로 압송당한다. 압송 경로는 아래와 같다.

 안디옥-셀레우케이아-길리기아 또는 밤빌리아 해안-빌라델비아-서머나-드로아-네압볼리- 서머나-드로아-네압볼리-

빌립보-마게도냐해안-로마

 이러한 경로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일부러 로마로 가는 시간을 늦추기 위해 여러 곳을 방문하고 우회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몇몇 학자는 두 가지 이유를 든다. 하나는 압송 경로와 시간이 길어질 경우 순교 열이 식어지고 살길을 찾게 될

것을 기대한 것이다. (마치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기 위해 아브라함이 사흘 길을 간 것처럼) 그럼 교회는 존경할만한

지도자를 잃게 되고 몰락하게 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여러 곳에서 교회 감독이 끌려 다니는 모습을 보고 기독교인들이

공포와 절망감, 무력감에 휩싸이게 되어 신앙을 버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로마로 압송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

들은 이그나티우스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이그나티우스는 교인들에게 자신을

석방시키기 위해 노력하지말라고 당부하기에 이른다. 이그나티우스는 석방되기 보다는 순교를 열망했다. 순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고 생각했다.

 

이그나티우스의 일곱  편지

이그나티우스는 로마로 압송되어 가면서 모두 7통의 편지를 쓴다.                                      

4통은 서머나에서, 나머지 3통은 드로아에서 쓴다. 초기 4통은 에베소서, 마그네시아서, 트랄레스서, 로마서이고,

드로아에서 쓴 3통은 빌라델비아서, 서머나서, 폴리갑서 이다.

이그나티우스는 편지를 통해 각 교회 안에 일어나고 있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제시한다다. 특별히 마지막 편지는 후에 순교하게 되는 서머나 감독이었던 ‘폴리갑’에게 쓴다.

 

이그나티우스의 편지에 나타난 사상과 내용

 이그나티우스의 편지에는 두드러진 몇 가지의 특징이 나타난다. 하나는 일치로의 열망이고, 두 번째는 가현설에 대한 경고,

세 번째는 순교에의 열망이다. 네 번째는 성찬에 대한 관심이다.

일치로의 열망은 이그나티우스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인 군주적 감독제이다. 군주적 감독제는 그당시 교회들이 처해있던

입장을 살펴볼 이유가 있다. 내적으로는 이단의 공격성, 그리고 외적으로는 제국의 박해에 가장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군주적 감독제가 최선이라고 그는 생각한 것이다.

 

교회는 하나다.

 적지 않은 학자들은 이그나티우스의 순교 이유가 하나님을 전했다는 이유 말고도 교회 안의 분쟁으로 인한 결과일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추측을 한다. 정확한 시기는 논란이 있지만 이그나티우스가 순교한 2세기 중반의 경우 교회는 안팎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외부적으로 로마의 박해가 지속적으로 계속되었고, 안으로는 이단으로 인한 교회 내부의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그나티우스는 편지를 통해 교회가 분열하는 것은 사단의 종노릇하는 것이라고 못 박았다.

마그네시아서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과 영에서 오는 일치가 이 교회들 안에 있기를 바란다. 또한 가장 귀중한

것인 믿음과 사랑에서 오는 일치,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아버지에게서 오는 일치가 있기를 기도한다.”

 아마도 마그네시아 교회는 타교회 비하여 심각한 분란이 일어난 것을 보인다. 이러한 분열은 거짓교사들의 그릇된

가르침과 교만, 유대교에 대한 잘못된 숭상으로 인한 것들이었다. 교회의 하나 됨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신자들은

지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분열과 분노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까지 말한다.(빌라델비아서 중에서)                      

가현설을 거부해야 한다.

 가현설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이 교회 안에 깊이 스며 들어왔다. 초대교회 이단 가운데 예수님의 사람 되심을 부인하는

이단들이 적지 않았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주요한 이단 논박의 대상은 다름이 아닌 영지주의자들이었다. 가현설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으로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지 않고 가현(假現)즉 거짓으로 나타났다고 믿는

것이다. 가현설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부인할 뿐 아니라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 속죄설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이그나티우스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신성과 사람의 인성이 함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삼위일체 이론으로 확립하게 이른다. 이그나티우스는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셨고,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으며,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주장한다. 또한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심을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르게 말한다면 여러분은 귀를 막으라. 그분은 다윗의 후손이시고

마리아에게서 참으로 태어나셨다. 그분은 먹고 마시셨으며 참으로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수난을 당하셨고,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것들이 보이는 앞에서 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돌아가셨다.”(트랄레스서 중에서)

 

서머나교회에 보내는 편지에는 ‘참으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고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셨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육신을 지니셨음을 알고 있으며 또한 이를 믿는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사람이 되어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다’. 이그나티우스의 가현설에 대한 반박은 진리를 담지한 교회로서의 일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감독을 중심으로 교회는 하나 되어야 한다.

 이그나티우스는 사도 이후의 가장 초기의 교부에 속한다. 1세기 중반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되는 이그나티우스가 살았던

시대는 교회의 분열에 홍역을 앓고 있었다. 그가 편지를 썼던 이유는 교회 안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교회의 일치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의 교회 일치는 감독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교회가 있듯이, 감독이 나타나는 곳에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감독 제쳐두고 세례를 주거나

성찬을 행하지 말라.”(서머나서 중에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인 것처럼 감독은 주님과 같은 존재로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에베소교회에 ‘감독을 주님처럼

여겨야 할 필요가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라고까지 말한다. 이그나티우스가 감독직 강조한 이유는 거짓교사들과 이단들로

인해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을 파괴하는 자들이며, 육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파괴하는 자들이었다.

마그네시아 교회에는 젊은 감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그나티우스는 마그네시아 교회에 이렇게 충고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감독이 젊다는 점을 이용하려 들지 말고 오히려 아버지 하나님의 권능에 따라 그를 존경해야 한다. ...

그렇게 하는 것은 그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감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 된다.”

 이그나티우스는 교회가 분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감독을 중심으로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유난히 마그네시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는 ‘일치’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이것은 교회 안에 심각한 분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그나티우스는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보편교회’(Catholic Church)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다.                  

이그나티우스가 말하는 감독은 로마 천주교회에서 말하는 감독과 주교가 아니다. 로마 교황은 더더욱 아니다. 그가 말하는

감독은 목사요, 장로로써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의 지도자들 중 으뜸되는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심히 유감스러운 것은 로마 천주교회가 자신들의 교권 확립을 위해 이그나티우스의 서신들을 지나치게 악용한다는 점이다.

(이그나티우스의 군주적 감독제를 현대 교회들 중에서 가장 잘 보여주는 교단 들 중 하나가 아마도 감리교단일 것이다.)

성경의 말씀들을 적용하여 저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위하여 교부들의 글을 지나치게 적용한다는

것이다.

 

성찬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바울이 편지한 고린도 교회의 문제 중 하나는 성찬으로 인한 교회의 분열이었다.  성찬과 함께한 초대교회의 공동 식사는

공동체의식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함께 공유했다. 그러나 일반 식사와 성찬을 겸한 애찬은 분명히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그나티우스는 교부 중 처음으로 성찬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 그는 에베소교회에 성찬에 대해 ‘불사의 약’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살게 하는 해독제’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그나티우스의 성찬 의식에는 신앙생활 전부가 담겨있다. 예수에 대한 믿음과 사랑, 고난과 부활의 의미가 성찬에 있다고

말한다. 그는 ‘한 덩이의 빵을 나눈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진리가 하나이고, 교회가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교회의 일치와 성찬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서마나 교회 편지에는 이단자들의 두 가지 잘못을 지적한다. 하나는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돕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찬과 기도를 멀리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저들은 사랑하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곧 과부, 고아, 고통 받는 이, 옥살이하거나 감옥에서 나온 이, 굶주리거나

목마른 이들에게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다. (이단들은) 성찬과 기도를 멀리한다. 저들은 성찬이 우리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살임을 고백하지 않는다. 성찬이야 말로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의 살이요,

아버지께서 자비로 일으키신 그리스도의 살인데도 말이다.”

로마 천주교는 자신들의 화체설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시 이그나티우스의 글을 악용하였다.

이그나티우스는 속사도 교부 중에서 독특하고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는 이단들에 대한 논박뿐 아니라 교회를 지키기

위해 감독을 중심으로 일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유대교의 허상을 파헤칠 뿐 아니라 성찬을 통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논한다. 대부분의 감독들이 그랬던 것처럼 순교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의 사상은 사도들의 정신을 이어

받으면서 앞으로 이어진 교회의 발전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그나티우스의 편지를 통해 니케아 공의회 이후

나타난 중세교회의 형태가 씨앗의 형태로 숨겨져 있는 것을 본다.

역사는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우리의 헌신과 봉사가 어떻게 자라고 변화를 일으킬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뿌려

놓은 삶의 흔적들은 다음 세대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루하루를 꿰어 역사를 만드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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