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10-22 07:03
15-1) 2000년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주요 사건 열전 - 로마 제국의 10대 기독교 박해 ① AD 65~AD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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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Henry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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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의 10대 기독교 박해


로마제국 하에 일어났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핍박은 흔히 ‘10대 핍박’이라는 말로 풀어보는 것이 좋다. 다시 말하면,

10회 핍박이 1~4세기 동안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전 로마제국에 걸쳐 동시적으로 핍박이 있지 않았다. 핍박을

시행한 황제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황제도 있다는 말이다. 대체적으로 모든 황제들이, 항상, 그리고 모든 지역에서

핍박이 있었다고 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제 1차 박해 : 황제 네로

여기서 주목해야하는 시기는 황제 네로 때이다. 그로부터 핍박은 시작한다. 그리고 황제 디오클레티안 시대에 이르러

전 로마제국에 가장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일어난 ‘대 핍박’이 있었다. 황제 데키우스 시대 때부터 대체적으로 로마

제국 전 지역에 핍박이 시행되다가 ‘디오클레티안’ 시대에 이르러 무자비하게 무조건적으로 기독교인들에게 핍박이

가해졌다는 것이다.

그럼 네로 때부터 시작된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살펴보자.

네로는 37년에 태어난 자이고, 그의 본명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Lucius Domitius Ahenobarbus)

이다. 그의 계부인 클라우디우스가 독살을 당해 세상을 떠나자 자신의 이름을 의붓아버지 이름을 따라 네로

클라우디우스 시저 (Nero Claudius Caesar)로 바꾸면서 황제직에 올랐다. 정신적으로 불안한 네로는 62년에 모친을

죽이고, 아내 옥타비아를 죽이고, 후에 포페아와 결혼했다. 하지만 둘째 부인마저 죽이고 만다.

64년 7월 로마 시에 큰 화재가 일어났다. 네로가 안치오에 거하는 동안 로마 시의 화재 소식을 들었지만 화재에 대한

대책을 서두르지 않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로마 시에 모습을 나타냈다. 소문에 의하면 퀴리날 언덕에 서서 시를

읊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분노한 로마시민들은 화재 책임을 네로에게 돌리려고 하자 그는 ‘기독교인들’에게 혐의를

두면서 그들을 처형하기 위해 시민들의 유희를 위해 사자의 먹이와 화형에 처하도록 했다.

『연대기』 (Annals)의 저자 타키투스 (Caius Cornelius Tacitus)에 의하면,

"소문을 없애기 위해 네로는 기독교인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복수심에 가득 찬 분노를 잔인하고 난폭하게

폭로하도록 했다. 네로가 고발했던 속죄양들인 기독교인들은 로마 주위의 여러 소문들에 의해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증오의 대상이었던 네로는 65년 자신을 독살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정신적으로 더욱

불안해져 갔다. 다음해, 66년 재혼한 포페아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분노의 두려움에 시달린

그는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네로 시대의 핍박은 64년 로마 시의 화재로부터 시작하는 셈이다. 그 화재는 조그만 상점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9일 동안 지속된 대화재는 전 로마시를 불태우고 말았다. 목재와 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운집하여 살고 있던

로마시는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겨우 두 곳만 불타지 않았는데  그 지역 모두는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화재 소식을 듣고 늦장을 부리는 네로를 보면서 사람들은 네로가 마치 ‘트로이’의 도시가 불타는 것을

연상하는 듯 즐기고 있는 것처럼 여겼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네로는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기 시작한다. 이러한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그는 화재의 책임을

기독교인이라 불리우는 유대인들을 앞으로 내세운 것이다. 자신의 의붓아버지인 클라우디우스가 49년에 유대인들을

로마 시에서 추방시킨 것을 이미 알고 있던 터라 그들에게 혐의를 씌우기가 용이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을 십자가에

불태워 죽거나 황소와 맹수들의 먹이로 던져 죽였다.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말이다. 그들은

죽음으로 신앙을 증명했다. 네로 시대의 주요한 순교자로 사도 바울과 베드로를 생각할 수 있다.


제 2차 박해 : 황제 도미티안

그럼 이제 황제 도미티안의 핍박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자. 도미티안 시대에 핍박을 받은 기독교인들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로마 집정관이며 도미티안의 사촌인 플라비우스 클레민스의 처형과 그의 아내 플라비아 도미틸다의

추방으로 유명하다. 또 기독교인들에게 ‘무신론자’라는 혐의를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역사에 관해 최초의 교회 역사가인 유세비우스가 쓴『교회사』 3권 17장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잔인하게 사람들을 다뤘던 도미티안은 귀족들을 부정하게 처형하여 그들의 재산을 몰수 하였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증오심과 적대심을 네로에 이어 표출하였다. 그는 그의 부친 베스파시안 황제가 기독교인들에게 아무런 편견을

가지지 않은 것과는 무관하게 기독교인들에게 두 번째로 핍박을 시도했다.”

18장에서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이 핍박으로 인해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한다는 이유로 인해 밧모섬으로 보내졌다. 교부 이레니우스는

자신이 쓴 『이단에 대하여』의 다섯 번째 책에서 요한 계시록에 쓰인 적그리스도의 이름을 논하면서 ‘현재 공개적으로

그의 이름이 알려져야만 한다면, 계시록의 기록을 보았던 분에 의해 알 수 있다. 지금 현재 우리 시대와 도미티안 시대

말기라고 말할 수 있다.’ ... 도미티안의 15년째 치리시기에 로마의 총독들 중 한 사람인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의 딸

플라비아 도미틸다는 폰티아라는 섬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추방을 당했다.

20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터툴리안은 도미티안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네로의 잔인성을 이어받은 도미티안은 네로와 동일한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다. 지식을 겸비한 자였지만 무식하게 행동을 행했다. 당시의 역사 기록에 의하면, 도미티안의

영예를 거부하고 부정하게 추방당한 사람들이 귀향하면서 자신들의 재산들과 명예를 회복했다. 이 시기에 사도

요한도 밧모섬에서 풀려나서 에베소에서 거하였다고 한다.”

도미티안 시대에 본격적으로 카타콤이 건설되었는데 현재 존재하고 있는 가장 큰 카타콤 중 하나는 도미틸라

카타콤이다. 그 안에는 지하에 자그마치 15km나 되는 좁고 긴 통로들이 있다. 어떤 통로는 접근할 수 없을 만큼 좁다.

통로는 주로 2층으로 되어 있다. 영원한 도시인 카타콤은 3-9세기의 기독교 공동체를 묘사하는 감동적이고 웅변적인

그림들이 벽에 그려져 있다. 3세기까지 초기 기독교는 자체 묘지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로마 시 밖에 있는 장지에

시신들을 안치했다.

3세기 말에 이르자 그러한 장지마저도 구하기 어렵게 되자 그들은 땅을 파서 시신들을 안치했다. 이러한 묘지들은

가끔 ‘바위를 판 무덤’ (hypogeums)이라 불리는 짧은 통로로 연결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땅을 적은 비용으로

구입하여 시신들을 안치했다.


제 3차 박해 : 황제 트라얀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트라얀 황제 때에 이르러 더욱 극심했다.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은 자신의 저서인

변증론에서 “기독교인이라는 단어는 곧 죽음이라는 단어의 대명사가 되었다.”라고 증언했다. 기독교인들에게 가해진

박해는 점점 극심해져서 심지어는 그들을 산 채로 소금에 절인 때도 있었고, 길가의 높은 나무에 매달아 밤새도록

불태워 죽인 일도 있었다.

트라얀 황제의 기독교 박해는 터키 북쪽 해안의 비두니아(Bithynia) 지방 총독이던 플리니 (Plini 주후111년에

총독으로 임명됨)의 기독교 박해에 대한 사건으로 인하여 크게 완화되었다. 총독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처벌을 일단

중지시킨 후 황제의 의견을 알아보기 위해 트라얀 황제에게 공문을 보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든지 기독교도가 되면 꼭 그렇게 처형되어야만 합니까? 그들이 실제로 무슨 나쁜 일을 한

것이 틀림없는 사실입니까? 제게는 집사라고 불리우는 여자 노예들이 몇 명 있는데, 저는  그들을 고문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서 몇 가지 특이한 생각들 외에는 아무것도 나쁜 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어리석은

것에 감염되어 우리의 신전 (神殿)은 거의 텅 비어 버렸습니다."( 플리니 서신 중)

"로마 통치 영역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은 황제의 법령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처벌에 관해서는

별도로 규정한 법이 아직은 없다. 따라서 그들이 특별한 죄를 범하지 않는 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색출해

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시간과 국력을 낭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고발된 자들은 로마 법대로 처벌하라.

황제 신상에 분향하고 예를 올리는 자는 방면하되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은 처벌하라. 그러나 익명으로 고발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말라. 그것은 로마의 법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트라얀의 답변)』

기독교인들의 신앙이나 그들의 신앙적 삶이 국가나 사회에 위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 졌고, 때문에 기독교를

적대시하던 자들이 오히려 기독교에 입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아울러 기독교에 대한 박해도 당분간은

주춤해졌다.


제 4차 박해 : 황제 하드리안

하드리안은 선임자인 트라얀 황제의 정책을 이어받았다. 황제 하드리아누스 (하드리안)는 티투스 장군의 아들로서

트라얀의 양자였다. 정신적 육체적인 열정이 남다르며 다재 다능한 황제였다. 전통적 다신론주의자이였으며, 황제

신격화에 주력 하였을 뿐 아니라, 125년에 발표한 칙령에 의하면 할례나 안식일에 회당에서 율법 읽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예루살렘 성전터에 주피터(제우스) 신전을 세우고 우상숭배 강요하였으며,  거부할 경우에는 사형에

처하였다.  기독교를 믿는 자체를 국법을 어기는 죄로 간주하고 로마 전역에 황제 신상을 비롯한 신상을 세우고

그것들에게 경배하라고 명령하였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왕과 주로 섬기면서 다른 신을 거부하는 기독교를 심히

증오하였다. 이 시기에 많은 기독교 변증가들이 등장하였다.


제 5차 박해 : 황제 아우렐리우스

제 5차 박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황제 치하에서 일어났다.

명상록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고, 철학과 학문에 조예가 깊어 사람들이 볼 때 훌륭해 보이는 황제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도 그리스도인들을 무자비하게 핍박했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가 본래는 어머니 교육의 영향으로

인간적이며 관대하고 부드럽고 경건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가 처음에는 그 시대의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기독교인들을 우호적으로 평가했다.                  

그런데 스토아(Stoa) 철학자인 가정교사와 미신을 믿는 점성가들에게 빠져들면서 기독교를 미신으로 취급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중요한 행사를 치를 때에는 이방 신들에게 희생 제사를 드렸는데, 그의 통치 초기에 외국의

침략, 홍수, 전염병 등 여러 재해가 뒤따랐다. 그는 기독교인들 때문에 신들이 노하여 이런 재앙이 로마에 임했다고

믿고 비밀 정보원을 동원하여 기독교인들을 잡아들였고, 심한 고문을 가하여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기독교 박해는 처참할 정도로 잔인하고 공격적이었다. 사로잡힌 기독교인들은 채찍에 맞아 온 몸이 찢어져

유혈이 낭자하고 속살이 드러나고 창자까지 밖으로 터져나왔다. 그런 후에 조개껍질이나 땅 위에 놓인 창 끝에

눕혀졌고, 온갖 종류의 고문을 받은 뒤에 사나운 짐승의 밥으로 던져졌다.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목을 베어 죽였고, 로마 시민이 아닌 기독교도들은 짐승들의 밥이 되게 했다. 감옥에서 죽은 기독교인들의 시체는

굶주린 개들에게 던져주어 장례 조차 지내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박해가 점점 심해지자 배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온갖 고문과 박해 속에서도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고, 순교 당하기도 했다.  

황제 자신이 스토아 철학자였기에 기독교를 이론적으로 반대하고 아주 체계적으로 기독교를 박해하였다.

황제 자신이 제국 내의 모든 자연재해의 원인이 로마 제국의 신들을 거부한, 즉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들로

매도하여 모든 재해의 원인제공자들로 정죄하고 비난하였다. 이 시대의 대표적 순교자로 저스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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