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10-26 03:52
15-2) 2000년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주요 사건 열전 - 로마 제국의 10대 기독교 박해 ② AD 65~AD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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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Henry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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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의 10대 기독교 박해 ②


6차 박해 : 황제 세베루스                                                                                                          

제6차 박해는 주후 202년 제국 안의 내란을 평정한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 치하에서 일어났다. 황제는 정치적

반대파를 물리치고 제국의 통일 유지가 필요했다. 제국 안의 모든 국민들이 '정복되지 않는 태양'을 예배하도록

명령했다. 만약 이 태양이 지존의 신(God)이라고 인정한다면 그 자에게는 다른 신 예배도 허용할 참이었다.   황제의

종교혼합 정책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황제는 이 두 종교의 확장을 막을 목적으로 유대교나

기독교로 개종하는 자들을 사형시켰다.                                                                                                                        

새 법령을 2세기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황제 트라얀의 처벌 법령에 추가했다. 이 박해는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과 복음

전도자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들을 로마의 종교로 개종하도록 유도했다.

이 시기에 신학자 터툴리안은 관용정책을 호소했고, 이레네우스가 순교했다. 오리겐의 아버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학살당했다.                                                

주후 211년,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가 죽은 뒤 한동안 평화가 찾아왔다. 박해가 중단되자 기독교로 개종하는 자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다수의 귀족들도 기독교인이 되었다. 박해를 받는 기독교인들의 확신, 소망, 경건한 삶,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을 보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고 부활한 예수 그 분이 주이며, 구원자 곧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듣고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었다.


7차 박해 : 황제 막시무스                                                                                                                                              

제7차 박해는 황제 트라키아의 막시무스에 의해 235년에 발생하여 잠시 진행되었다. 그는 기독인들에게

관용적이었던 선임자 알렉산더 세레루스의 정책을 반대할 목적으로 박해했으며, 예수 신앙인들이 자신이 암살한

전임 황제를 지지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압박했다. 막시무스 황제는 기독교인들을 무지비하게 죽이지는 않고 마침

제국내 발견된 여러 금광들의 개발에 기독교인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했다. 이때 히폴리투스를 포함한 많은

성직자들이 처단되었다.                                                                                  


제8차 박해 : 황제 데키우스                                                                                                               

제8차 박해는 주후 249년에 데키우스가 황제로 등극했을 때 일어났다. 황제는 로마의 영광을 수복하고 싶었다.

야만족들의 침입, 경제적 위기, 전염병 확산 등의 원인을 로마인들이 섬겨오던 신들을 져버렸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로마의 옛 영광을 복구하는 길은 로마의 옛 종교를 수복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하면 로마의 신들이

제국에 다시 복과 행운과 번영의 은혜를 베풀 것이라고 생각했다. 황제는 종교적인 군중시위를 지휘하면서

조직적으로 기독인들을 공격했다. 그는 예수 신앙운동이 제국에 위협적인 세력 집단이라고 생각했다.                        

황제는 주후 250년경 로마의 옛 신들을 예배하는 우상숭배를 강요했다. 애국심을 표현하는 종교적 국민의례인

황제 숭배도 의무화했다. 황제의 상 앞에 향불을 피우게 했으며, 이를 거부하거나 반대하는 자들을 반역자로

취급했다.                                                                  

황제는 기독교인들의 고집을 꺾거나 처벌하기보다는 로마의 신들을 섬기는 많은 배교자들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예수 신앙운동을 완전히 파멸시키려 했다. 기독인들에게 로마의 옛 종교로 복귀하라고 명령했다. 데키우스의

종교정책은 정치적 동기와 로마의 신들에 대한 신앙적 성격을 동시에 지녔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제국 전역에서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국민들은 로마의 옛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황제 데키우스의 조상 앞에 분향을 하고 절을 했다. 정부 관리들은 황제숭배-국민의례에 참여한 자들에게 증명서를

발부했다. 이는 황제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와 거역하는 자를 구분할 목적이었다. 처절한 저항과 혹독한 박해가

수반되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무릎을 꿇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얼마 동안 버티다가 체포되어, 마지못해 제물을

바치고 분향했다. 박해를 피하려고 위조 증명서를 매입하는 자들도 있었다. 끝까지 신앙을 굳건히 지킨 자들도 적지

않았다. 손발이 잘리고 불구가 된 기독교인들도 많았다.                          

로마는 각종 회유, 고문, 협박으로 기독교인들의 배교를 유도했다. 오리겐이 이때 투옥되고 고문을 당했다. 그는

출옥 후, 다음 황제가 통치할 때 숨을 거두었다.                                                                    

주후 249년과 250년에 걸쳐 일어난 극심한 박해는 251년 새로운 황제 갈루스에 의해 중지되었다. 박해가 끝났을 때,

교회는 과거사 청산과 권징 문제로 말미암아 갈등을 겪었다. 엄격한 입장을 가진 장로 노바티안을 따르는 자들이

분리하여 독자적인 기독교 공동체를 이루었다.                                                    


제9차 박해 : 황제 발레리안 

제9차 박해는 황제 발레리안 치하에서 일어났다. 주후 257년과 258년, 두 해에 걸쳐 진행되었다. 황제는

기독교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공민권(公民權)을 박탈했다. 집회를 금하고, 모든 감독들을 체포하라고 명했다. 예수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기독교인들과 감독들을 죽이라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황제는 물러났고, 후계 황제 는 260년

기독교인들에 대한 제재 명령을 철회했다. 교회의 재산을 기독교인들에게 되돌려주었다.      

이때부터 기독교인들에게 약 40년 동안 평화가 찾아왔다. 신도 수와 교회 재산이 급속하게 증가했고, 주요 도시에

웅장하고도 화려한 예배당들이 건립되었다. 반면 교회의 권징이 느슨해지고, 그 틈새에서 분쟁과 음모와 분열이

증가했다. 세속 정신이 교회 안으로 홍수처럼 밀려 들어왔다.


제 10차 박해 : 황제  디오클레티안                                                                                   

대박해로 일컬어지는 초대교회의 가장 비극적이고 잔인한 핍박은 제4세기 초 황제로 등극한 디오클레티안 치하에서

발생했다. 황제는 제국을 재정비하고 새로운 번영을 가져왔다. 그의 아내와 딸이 기독교인이었다고 전해진다. 박해는

군대 입영을 기피하는 기독교인들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주후 295년경 입영을 기피하거나 부대를 이탈하는 신자들이

생겼고, 그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당시 로마 제국은 네 지역으로 분할 통치됐다. 이는 황제 직위 계승을 둘러싼 분열과, 내란과 분쟁을 종식시키려는

황제의 조치였다. 디오클레티안은 모든 기독인들을 군부에서 축출하도록 요구하는 총독들의 요구를 디오클레티안

황제는 받아들였다.                                                                                                                        

디오클레티안 치하의 다뉴브 강 지역 주둔군 병사 상당수가 처형당했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디오클레티안의 증오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로마 제국의 고위 관직을 맡은 기독교인들을 모두 그 직책에서 축출하도록 각 주의

총독들은 황제를 설득했다. 주후 303년 기독교인 공직자들을 모두 파면하고, 웅장한 교회당들을 파괴했다. 성경들을

불태웠다. 디오클레티안은 황궁에서 발행한 두 차례의 화재를 기독교인들의 보복 방화라고 몰아붙였다.  분노한

황제는 기독교인들이 반역을 꾀한다고 확신하여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우상 앞에 절하고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지시했다. 제물을 먹으라고 했다. 그는 기독교인들의 예수 신앙 포기를 원했다.

그들을 양자택일의 궁지에 몰아넣었다.                                                                

기독교인들은 배교하든지 굶어죽든지 해야 했다. 무쇠와 강철, 불과 칼, 고문과 십자가, 맹수들과 짐승 같은 인간들이

하릴없는 목적에 동원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반응했다. 압력에 굴복하는가 하면, 고문을 견디어내고

잔혹한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페르시아로 망명한 자들도 있었다.                                                                                  

로마 행정 당국은 기독교인들에게 예수 신앙을 포기하는 증표로 성경을 정부 관리에게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성직자들 가운데는 성경을 불태우도록 관리에게 건네준 자들이 많았다. 이단 서적들을 내어주어 예수 신앙을

포기하는 체 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늘의 생명보다 지상의 생명을 선택한 배교자들도 많았다. 박해가 맹렬하게

전개될수록 진실한 예수 신앙인들의 열정과 충성심이 뜨거워졌다.                                                                                

이때 여러 가지 정치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디오클레티안은 주후 311 년 급환으로 쓰러졌다. 정치적 혼란 중에도

기독인들에 대한 박해는 계속되었다. 신체를 절단하고, 채석장 강제 노역을 시켰다.  생명력을 가진 신자들은 예수를

배신하지 않고 채석장과 노역장에서 함께 모여 자신들의 주이며 구원자인 예수께 예배를 드렸다.                                

디오클레티안은 중병을 앓으면서 자신의 병이 기독교인들을 향한 박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기독교인들을 극심하게 박해했어도 의도한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사람들이 디오클레티안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때였다. 시리아 지역을 관할하던 통치자 막시무스도 기독인들을 사납게 박해했다.                

황제 디오클레티안이 죽고 난 뒤, 제국은 다시 4개 지역으로 분할 통치되었다.                      

 서부 지역 통치자 콘스탄티누스는 군사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부 지역 전체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기독교인들에게 관용적이었다. 밀라노에서 인근 지역의 통치자 루시니우스를 만나 통일 협상을

성공시켰다. 이 협상 목록에는 그 지역의 기독교인 탄압을 중지하고 교회, 묘지, 재산을 돌려준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바로 이것이 밀라노 칙령(313)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전쟁 중에 꿈 속에서 기독교를 상징하는 표지를

병사들의 방패에 부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계시'를 받은 대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헬라어 두 글자 '치로

(Px를 겹쳐 표기)'를 군기에 표시했다. 지중해 지역 천하를 통일시킨 콘스탄티누스는 '정복되지 않는 태양'을 섬겼다.

새 통치자의 기독교 개종은 다분히 정략적이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인 수가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었고, 민심이

잔인한 통치자를 떠나 기독교인들을 동정하자 이를 역이용했다.                                                                                  

여러 해 뒤에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았다. 드디어 십자가가 칼을 이기고 승리의 월계관을 썼다.

그러나 예수 신앙과 정치 권력의 숙명적인 결합이 시작되었다. 박해가 끝난 뒤 기독교는 과거사 청산 과제와 권징

건 때문에 분열을 겪었다. 장로 도나투스를 중심으로 한 그룹이 갈라져 독자적인 기독교 공동체를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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