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11-09 13:26
16-2) 2000년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주요 사건 열전 - 밀라노 칙령- 313년 ② AD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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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Henry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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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칙령 (Edict of Milan) - 313년

밀라노 칙령은 로마 제국의 통합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이었기도 하다.

로마 제국의 평화적 통치를 위한 종교적 자유의 선언으로 박해 받던 위치에서 국교는 아니지만 기독교와 로마의 다른 전통

종교들은 동등하게 대접받았다. 이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콘스탄티누스는 자신과 제국의 통치를 분점하고 있는 동방의

리키니우스황제의 눈치를 봐야 할 뿐 아니라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또 죽기 전까지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로마의 전통적인 신들에 대한 제례를 관장하는 최고 사제인

폰티펙스 막스무스(Pontifex Maximus) 직도 버리지 않았다.

 

321년 칙령에서는 기독교이든 아니든 일요일(Sunday)을 지정해서 이 날은 재판도 하지 않고 관공서도 열지 않으니

도시의 다른 직업 종사자들도 일을 하지 말고 공식적으로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치로 인해 태양 신의 날(dies Solis, 디에스 솔리스)은 바로 우리가 일요일(Sunday)이라고 하면서 태양 신을

숭배했다고 하는데 꼭 그렇게 만 볼 것이 아니라 제국의 통합을 위한 조치이다.

그래서 그런지 일요일에 의무적으로 쉬는 것은 농민은 예외였다. 날씨의 영향을 받는 농사일의 특성 때문에 예외로 하였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의 모습이 들어간 화폐에도 페르시아의 태양 신 미트라 신(神) 즉 '솔린빅투스'의 모습도

넣었는데 'SOLIINVICTO COMITI(정복되지 않는 태양신에게)'라는 명문(銘文)은 그의 시대에 주조된 많은 주화에서

보인다. AD 320년 그는 주화에 옛 신들의 상징들과 이름들을 새겨 넣었다. 이러한 증거들로 볼 때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 인정해 주었지만 기독교와 태양 신 숭배 사이의 화합과 타협을 추진하여 로마제국의 안정과

통합을 먼저 생각한 듯 하다.

콘스탄틴 황제는 <하나의 제국 one Empire, 하나의 법 one Law, 하나의 시민One Citizen, 하나의 종교 one

religion>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이후 기독교 지도자들은 새로운 사회적 신분과 세속적 이익을 얻었다. 감독(장로)들은 높은

명예를 가지게 되었으며, 교회들이 신축되었다. 그는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긴 다음 도시를 확대해 콘스탄티노플로

개명하고, 그곳에 수많은 예배당을 건축했고 이로 인해 자연히 출세를 위해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불로 시험을 받던 교회가 이제는 호의로 시험을 받았다.”

(롤랜드 베이튼, 1894~1984).

“(예배당) 지붕은 금으로 치장하고 대리석을 끼워 장식하고 있다. 한때는 불꽃 속에 던져졌던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책이

이제는 화려하게 제본되고 황금과 보석으로 꾸며지고 있다.”              (제롬, 345?~419?)

 

많은 가짜 기독교인들이 생겨났고, 점차 많은 사람들이 매우 무가치한 동기로 성직자 세계에 들어왔다. 순교를

각오한 신자들만이 들어올 수 있었던 교회가, 정치적 야심을 품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오는 세속적인 교회로 변질되어

가기 시작한다. 로마제국 공식 인정 종교가 된 교회는 몰수 재산이 반환되고, 성직자에게는 조세부담 면제의 특권이

주어지고, 신자간의 투쟁에 감독(장로)재판권이 인정되었다. 이런 조치는 교회가 제국의 통치 기구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기독교는 공인과 함께 변질되어서, 세속권 지배에 가장 유효하게 적응할 수 있는 체질을 구축했다.

즉, 교회가 로마 천주교 화, 타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대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됨으로 인한 타락상을 꿰뚫어 본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황제의 명을 거역했다는 죄목으로 고통과 심지어

순교까지 당한 사실이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전문은 락탄티우스가 저술한 "박해자의 최후(De Mortibus Persecutorum)"에 기록된 라틴어 판과

유세비오가 저술한 "교회사(Ἐκκλησιαστικὴ ἱστορία / Historia Ecclesiastica)"에 기록된 그리스어 판이 있다. 둘 다

기본적 내용은 같고 일부 서술에 차이가 있다.

 

밀라노 칙령 전문

전부터 우리(콘스탄틴와 리키니우스) 두 사람은 신앙의 자유를 방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왔다. 뿐만 아니라 신앙은

각자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결정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따라서 우리 두 사람이 통치하는 제국 서방에서는

이미 기독교도에 대해서도 신앙을 인정하고 신앙을 깊게 하는 데 필요한 제의를 거행하는 자유도 인정했다. 하지만

이 묵인 상태가 실제로 법률을 집행하는 자들 사이에 혼란을 불러일으켰고, 따라서 우리의 이런 생각도 실제로는

사문화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정제 콘스탄틴과 정제 리키니우스는 제국이 안고 있는 수많은

과제를 의논하기 위해 밀라노에서 만난 이 기회에 모든 백성에게 매우 중요한 신앙 문제에 대해서도 명확한 방향을

정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것은 기독교도 만이 아니라 어떤 종교를 신봉하는 자에게도 각자가 원하는 신을 믿을 권리를 완전히 인정하는

것이다. 그 신이 무엇이든, 통치자인 황제와 그 신하인 백성에게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준다면 인정해야 마땅하다.

우리 두 사람은 모든 신하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며 최선의 정책이라는 합의에 이르렀다.

오늘부터 기독교든 다른 어떤 종교든 관계없이 각자 원하는 종교를 믿고 거기에 수반되는 제의에 참가할 자유를

완전히 인정받는다. 그것이 어떤 신이든, 그 지고의 존재가 은혜와 자애로써 제국에 사는 모든 사람을 화해와 융화로

이끌어 주기를 바라면서...

 

-지 령-

우리 두 사람이 이렇게 결단을 내린 이상, 지금까지 발령된 기독교 관계 법령은 오늘부터 모두 무효가 된다. 앞으로

기독교 신앙을 관철하고 싶은 자는 아무 조건도 없이 신앙을 완전히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기독교도에게 인정된 이

완전한 신앙의 자유는 다른 신을 믿는 자에게도 동등하게 인정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가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것이 제국의 평화를 유지하는데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어떤 신이나

어떤 종교도 명예와 존엄성이 훼손 당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것을 훼손 당하는 일이 많았던 기독교도에 대해서는 특히 몰수당 한 기도 처의 즉각 반환을

명하는 것으로 보상하고자 한다. 몰수된 기도 처를 경매에서 사들여서 소유하고 있는 자에게는 그것을 반환할 때

국가로부터 정당한 값으로 보상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여기에 명기한다.

  • A.D 313년 6월 밀라노에서 로마의 두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가 공표 -


밀라노 칙령은  혹자들이 잘못 알고있는 로마제국의 기독교  국교화가 아니다. 로마제국이 지난  수백 년간 공인해 온

종교들처럼 기독교도 박해 없이 예배 할 자유를 받은 셈이다. 또한 이미 1세기에 대부분의 교회들은 주일 날에 공식

예배를 드려왔다.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로마제국이 태양의 날 즉 일요일에 예배드리도록 하였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역사를 배우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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