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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역사 이야기

[고신역사 아카이브] 49. 총회교육원의 전문화와 SFC의 급격한 성장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49. 총회교육원의 전문화와 SFC의 급격한 성장

경남(법통)노회가 기반이라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해 온 고신교회는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국적인 교단으로 발돋음하는 변화가 있었다. 1993년 총회회관이 완공되면서 전국에 흩어져 있던 기관들이 총회회관으로 모여 총회 본부의 역할이 강화되었다. 동교동에 있던 총회사무실과 기독교보, 부산 송도에 있던 총회교육위원회, 부산 초읍에 있던 총회선교부, 그리고 SFC가 한 곳으로 모였고, 1993년에는 PCA가 철수하면서 기증한 대전 선교기지에 선교센터가 확보되었다. 1990년대이후 교단에서 총회교육위원회와 SFC가 두드러진 성장을 보였다.

1960년대 중반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계단공과 ‘생명의 양식’을 간행했지만, 후속 조처가 없었고, 이후 고신교회가 1970년대에 분쟁에 휩싸이면서 교육이 정체되었다. 그런 기간이 15년 정도 지속되면서 1980년대초 교회교육 문제는 교단적인 숙제가 되었다. 1982년 총회교육위원회가 설치되었지만, 인적, 물적 자원이 투입되지 않는 제도로는 실효성이 없었다.

1984년 간사 제도가 도입되면서 송길원 강도사가 첫 전담간사가 되었지만, 단기필마라 한계가 있었고, 제38회(1985) 총회에서 교사통신대학 개교를 결의하면서 김상옥, 나삼진 간사가 보충되었다. 그 시기부터 교사통신대학 운영과 교재 개편으로 총회 지원 없이도 재정 운용이 가능해 교단교육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다.

1982년 총회교육위원회가 설치될 때 책임자는 ‘총회의 신학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총회적인 컨센서스가 형성되어 신학대학원장 홍반식 박사가 초대 위원장이 되었다. 이어 오병세, 이근삼, 김병원 박사의 마지막 임기 2000년까지 신학대학원장 혹은 고신대총장이 위원장이 되면서 정치에 휘둘리지 않아 다행이었고, 전문적인 사역이 가능했다.

총회교육위원회는 1989년부터 교단교육 진흥 5개년 계획으로 체계적, 정책적인 교육사역이 가능했다. 이 시기부터 독자적으로 간사 유학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총회교육위원회 설치 20주년(2002)을 맞이하여 기념세미나를 갖고, 제54회 총회 결의로 2005년 1월 총회교육원으로 전환되었다.

총회교육원의 총체적인 사역은 교단 역사와 한국기독교교육사에서 몇 가지 주목할만한 의의를 갖는다. 먼저, 총회교육원은 지속적인 ‘생명의 양식’ 개편, 총회교사대학과 총회성경대학 운영, ‘복있는 사람’ 큐티사역, 교육지도자 양성, ‘교회와 교육’ 간행과 출판 사역을 이끈 교육벤쳐로서 한국교회 교단교육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그 무렵 클릭 바이블 시리즈와 그랜드스토리 시리즈는 각기 150만 부 이상 발행되어 한국교회 교육을 주도하였다.

둘째, 총회교육원은 교단교육진흥 제1차 5개년 계획(1989-1994)과 후속계획으로 교회교육 정책이 체계화되고 조직화되었다. 당시 합동측 ‘기독신문’은 정치에 휘둘리던 합동측 교육국과 달리, 고신측 교육이 ‘교육정책 독립으로 큰 효과를 거두었다’고 여러 차례 평가했다.

셋째. 총회교육원은 인재 양성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는 교단교육이 한국교회 정상으로 발돋움한 이유가 되었다. 이근삼 박사와 심군식 목사의 지원으로 대표간사 나삼진 목사와 박흥철 목사가 유학을 다녀왔고, 후일에는 제인호(한양대), 안동철(리버티신학대학원), 김성수(단국대), 이기룡(연세대), 박미화(숙명여대), 윤종필 등이 교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마쳤다. 총회교육원 인력의 전문화와 전문화된 사역으로 연구원들의 연구역량이 크게 강화되었고, 그들이 목회로 나가서도 큰 성과를 얻고 있다.

넷째, 총회교육원의 독립성과 전문성이 교단교육의 발전을 이끌었다. 처음부터 총회의 지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젊은 간사들의 헌신적인 사역으로, 독립성과 전문성이 보장된 사역이 얼마나 효율적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2013년 전후로 교단정치에 휘둘리면서 불행한 시기를 보내어야 했다.

1990년대 이후 SFC 또한 상당한 규모로 성장하였다. 1970년대 한국교회의 성장으로 1970년대에 대학생층이 두터워졌다. 1971년에 SFC에 간사 제도가 도입되면서 김만우를 시작으로 변의남, 장희종 등이 겸임간사로 일하였고, 강영순, 안용운, 이성구 등이 전임으로 사역했다.

1970년대까지 겨울에 개최하던 동기수양회는 같은 지역에서 중고대학생들의 집회를 분리해 개최되었지만, 참가 학생들의 증가로 이를 수용할 수 있는 교회가 없게 되고, 또 석유파동으로 겨울수양회에서 난방비가 큰 부담이 되었다. 1980년 수양회를 마친 후 연구위원회를 구성해 준비한 결과 3년마다 여름에 전국수양회를 개최하기로 하였고, 동기수양회를 지방별로 개최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새로운 수양회는 광주수양회(1983)와 대전수양회(1986)로 이어졌고, 비영남권에서 수양회가 개최되었지만 참가자들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1990년대에 대학생대회도 참가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SFC수양회는 고신교회의 새로운 희망으로 주목받았고, 1997년 덕유산에서 개최된 50주년 대회에는 1만 5천 명이 참여하였다.

SFC는 1985년부터 간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고, 세계복음화의 발판으로 해외지부도 개척되었다. 간사들은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스스로 모금으로 기본적인 급여만 받았지만, 캠퍼스를 개척해 성경공부 인도와 캠퍼스 사역이 확장되었다. SFC에서 간사가 100명으로 증가하고, 운영도 간사 중심으로 전환되어, 1990년대 중반부터 SFC의 특질이었던 자발성 약화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SFC간사 출신 목회자들의 교단 정치적인 편향성을 지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미국의 청소년사역학자 Mark Senter III는 미국 청소년 사역의 세 차례 물결이 있었음을 지적했는데, 1차(1824-1875)는 주일학교운동과 YM/YWCA, 2차(1881-1925)는 CE와 스카우트, 3차(1935-1987)는 영 라이프와 YFC 등이었다. 미국의 기독학생운동의 역사를 볼 때 시대의 변화를 내다보고 지속적인 자기갱신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단체는 미래가 보장되지 않았다. 빛나는 역사를 자랑하는 SFC가 지난 몇 해 동안 여러 곳에서 공격을 받아 동네북 신세가 되었다. SFC도 이즈음에 달려온 길을 뒤돌아보며, 신발끈을 다시 묶어야 할 때이다. 내일과 위기를 대비하지 않는 기관은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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