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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역사 아카이브] 50. 고신교회의 지역 확산과 3천교회 운동


50. 고신교회의 지역 확산과 3천 교회 운동의 전개

고신교회 SFC와 장로 출신으로 고려신학교 대학부 교수를 거쳐 총신대학에서 평생 가르치고 은퇴하였던 홍치모 교수는 “고신교회가 추풍령 이북으로 확산되는 노력을 더 해야 했다”고 영남지방에 머문 교회쇄신운동의 아쉬움을 언급한 바 있다.

경남(법통)노회가 중심이 되었던 고신교회는 교회쇄신운동 과정에서 총회에서 추방된 후 총노회로 시작하였는데, 서문로교회가 중심이 되어 경북지역으로 확장되었고, 경주교회를 담임하였던 윤봉기 목사를 통해 경동지역으로 확장되었다. 전라지역은 초기부터 광주를 중심으로 은광교회(당시 루문동교회)가 중심을 이루었고, 손양원 목사의 영향으로 여수지역이 기반이 되어 충무동교회가 지역의 중심을 이루었다.

고신교회의 입장에서 영남 이외의 지역에서 사역한 목회자들의 헌신과 희생은 참으로 큰 것이었다. 이들은 총회파를 떠나 고신교회라는 이유로 지역교계에서 소외되었다. 특히 호남지역의 교회들은 외롭게 고신교회의 진리운동에 동참하였는데, 교통이 불편했던 상황에서, 광주나 전라지방에서 영남에서 개최되던 총회나 회의를 오가기는 서울을 오가기보다 더 힘들고 불편했다. 필자가 대학생 시절에 ‘월간고신’ 취재차 증축중이던 광주은광교회(1981)를 방문했을 때, 이선 목사는 ‘아직도 고신교회를 이상한 교회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을 정도였다. 이들의 수고가 그 얼마나 컸으랴?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부산에 피난을 왔던 정부가 환도하고, 부민동에 있었던 전시연합대학이 서울로 올라가면서 서울에서 개척교회가 다수 설립되었다. 충현교회(서울동일교회, 김창인), 남산(고흥봉), 북창(명신익), 중앙(전칠홍), 영천(이동수), 동부(정헌택), 명륜동교회(이병규), 아현동(김현봉), 성산(황기종), 내자동(김승곤) 등의 설립으로 1950년대 중반에 30교회가 되었지만, 1957년 경기노회 보류파의 행정보류와 승동측과의 합동과 환원으로 두 차례에 걸쳐 서울지역의 다수의 교회를 잃었다.

고신교회는 합동당시(1960)에 590교회였지만, 환원하면서 수도권 교회를 대거 상실하였고, 1978년에야 600교회에 이르게 되었다. 한 번의 아쉬운 판단으로 고신교회가 합동 전 600교회로 회복하는 것에 꼭 20년이 걸린 셈이었다. 한국교회 고도성장기에 교회성장의 기회를 잃었고, 초기의 강력했던 교회쇄신운동의 운동력도 크게 상실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이를 극복하고자 한 새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는데, 총회장과 이사장을 지낸 박창환 목사가 강력한 리더십으로 충청지역 개척운동을 전개하였고, 1980년대 후반에는 조재태 목사가 전라지역 개척교회 운동에 앞장섰다. 그 과정에서 고신교회 열세지역들인 호남과 충청지역에서 교회들이 보강되었다. 고신교회에서 신학대학원의 중부권 이전, 반고소 고려총회와 합동으로 수도권 교세 흡수, 고려신학대학원 졸업생들이 충청지역과 경기지역으로 개척으로 교세가 중부권과 수도권으로 확장되어 전국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오랫동안 부산경남, 대구 경북, 울산 등 영남 5개 광역시에 소재한 교회가 70%에 달했는데, 지금은 65%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고신교회는 ‘삼천교회 100만성도 운동’으로 중부권과 수도권으로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제57회 총회(2007)에서 중부산노회의 청원으로 2천 교회 확장운동을 결의하였다. 이 청원은 전도위원회에서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2007년은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로 1,600교회에 이르는 고신교회가 새로운 각오와 결단으로 부흥의 전열에 서자’는 것이 취지였다. 고신총회는 그동안 세례교인 ‘천 원 헌금’을 해 왔는데, 당시 세례교인이 20만 명 정도이므로 약 2억 원이 확보해 전도운동에 힘쓰려 한 것이었다.

조금은 황당한 이야기이지만 처음 ‘삼천교회 운동’을 총회에 처음 보고할 때는 ‘2천교회 운동’이었다. 총회 회무를 인도하던 총회장 김성천 목사가 ‘2천 교회가 무엇이냐?’고 지적해 즉석에서 ‘3천교회 100만성도 운동’이 되었다. 제58회 총회기에 3천 교회 운동 첫 교회로 진해노회가 개척교회 부지를 확보한 상태에서 풍성한교회(안길동 목사)를 개척한 것이 제1호 교회였고, 첫 회기 동안 21교회가 개척되었다. 3천교회 운동 전개 7년만에 200호에 달하였다.

총회 전도위원회는 교회가 개척되면 설립예배를 주관하였고, 3천교회 설립운동에 참여하는 교회에 천만 원의 격려금을 지원하였는데, 2013년부터 1,500만 원으로 증액하였다. 그동안 전도위원회는 개척자금을 대여하기도 하고, 신학대학원 교육과정에 교회 교회개척 과목이 편성되기도 했으며, 개척교회를 순방하여 격려하기도 했다. 그동안 열 차례 이상 개척교회 보고대회를 개최하였고, 개척교회 훈련원을 운영하여 개척교회를 위한 실제적인 준비를 하게 했다.

총회전도위원회는 제65회 총회를 앞두고, 당시까지 설립된 200교회에 대한 규모있는 백서를 발간하였다. 역대 임원, 지원금 내규, 기독교보의 관련 보도 기사, 개척교회 분류 현황, 그때까지의 200교회의 리스트, 교회 단위의 기독교보 기사 노회별, 지역별 등 분류가 정리되었다.

백서에서는 그동안 설립된 교회를 지역적으로 분류했는데, 서울경기/인천 48, 경남/울산 44, 부산 37, 대구/경북 31, 전라 16, 충청/세종 15, 강원 5, 제주 4교회 등이었다. 총 200교회 중 44%가 비영남지역에서 개척되었는데, 이는 총회의 비영남권 교회 분포 비율보다 약 10%를 상회하는 수치이다. 이는 교단의 분포보다는 훨씬 더 많은 개척교회가 수도권과 충청권 등 중부지역에서 개척되었다는 것이며, ‘3천교회 100만성도 운동’의 전개로 고신교회의 부산경남 집중현상이 다소 완화되고 있다. 또 개척교회가 용이하지 않은 오늘날 200교회 가운데 폐쇄된 교회가 10교회 정도인 것을 고려할 때 높은 정착율을 보이고 있다는 보고이다.

이제는 한국교회의 중요교단과 함께 고신교회도 저출산의 여파로 주일학교가 없어지고 있는데, 이는 빠르게 중고등부로 연결되고 있다. 한국교회의 대사회신인도 약화와 젊은이들의 종교에 대한 무관심으로 교인 수가 날로 감소하고 있어, 총회적인 대책이 시급한 실정이다. 아울러 ‘3천교회 100만 성도 운동’도 그 성과와 그림자를 돌아보고, 그 전략을 보강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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