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미국정치를 잘 모르고, 또 어느 정파를 강단에서 지지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번 난민 정책에 대한 소위 바이블 벨트를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자들의 결정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프렝클린 그래엄은 국제 구호단체인 ‘사마리아인의 지갑’의 대표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슬람 교도들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난민들이 바다를 떠돌며 죽어 가는데도 수용을 반대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가 조직한 구호 단체의 이름이 ‘사마리아인의 지갑’인데 말입니다. 그는 강도 만난 나그네를 외면했던 레위인과 제사장입니까?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가진 재물을 사용해서 돕고 구하는 사마리아인입니까? 이러한 논쟁 끝에 많은 목회자들이 개탄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 미국 복음주의에 복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강한데, ‘어떻게 믿음으로 살 것인가?’에 대해서는 오히려 믿음과 반대되는 삶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지만 삶이 복음적이지 않을 때 우리의 믿음과 삶이 충돌합니다. 서로를 부정합니다. ‘사마리아인의 지갑’의 대표가 강도만난 나그네가 위험하다고, 자기 뿐만 아니라 국가가, 국민 모두가 그들을 외면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에 복음주의라는 말을 보편적으로 사용하도록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다면 John Stott입니다. 그가 복음주의자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라고 하는 건강한 신학과 ‘어떻게 믿음을 살 것인가?’라는 건강한 신앙의 균형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은 육신이 되고 믿음은 삶이 되고 복음에는 복음적인 삶으로 실천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 참된 복음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는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초대교회 당시의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면서 말세에 교회의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종교생활은 하되 복음이 마음과 생각과 삶과 관계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는 말입니다. 복음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복음적 삶의 변화’는 없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아버지 바울은 영적 아들인 디모데에게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배우고 확신한 대로 살아가라!‘(딤후 3:14)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음에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인데....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케하여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딤후 3:16-17) 복음의 목적은 우리의 삶의 변화와 세상의 변화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