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수용 회장 / 앨라매마 한인회연합회, 종합건설 SYS-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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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8-14 10:02
벼랑 끝에 선 용기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다
심수용 앨라배마 한인회연합회 회장은 1989년, 39세의 나이에 미국에 왔다. 만 28세에 건설회사를 설립해 30대 초반에 직원 수가 3천 명에 달할 만큼 성장시켰지만, 잘못된 투자로 고배를 마신 그는 벼랑 끝에서 용기를 내야만 했다.
“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로 승승장구했지만, 내리막길이 있더군요. 경험이 없는 호텔 경영에 4백억원을 투자했다가 어려움을 겪었지요. 리모델링한다고 돈을 쏟아 부었고, 전문경영인을 영입했지만 매달 몇 억씩 적자가 나서 3년을 끌고 가다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 당시 딸이 중 2학년, 아들이 초등 5학년으로 감수성이 예민할 때였는데, 하루 아침에 셋방살이를 하게 되니 충격이 컸겠지요. 돈 앞에서는 의리도 없더군요. 등을 돌리는 회사 경영진에 배신감을 느꼈고, 죽이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하지만 ‘내 회사 가지고 잘 먹고 잘 살아라’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살기보다는 다른 나라에서 살자’는 마음이 들더군요. 처음에는 영주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미국에 온 지 한 달 후 한국에 나갔는데 ‘저것이 내 것이었는데…’하며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한국을 잊자. 아직 젊으니까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보자’고 다짐했고, 그 후로는 10년 동안 한국을 찾지 않고 일만 했어요. 멕시칸 20명과 함께 먹고 자면서 5년을 보냈습니다. 일이 있으면 바로 뛰어나갈 수 있는 24시간 기동대처럼 움직였지요.”
한국을 잊자. 뒤돌아보지 말자.
심 회장은 “먹고 사는 것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과거를 잊고 싶었다”고 말했다. 인생을 새로 출발하자는 각오로, 앞만 보고 뛰었다. 미국 땅에 그의 화려했던 과거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이미 1976년에 미국으로 이민 오셨던 형님이 당시 중대형 규모의 그로서리 스토어를 운영했었습니다. 건설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기에 직접 스토어 건물을 짓자고 제안했어요. 불도저를 빌려 형님이 사두었던 땅을 혼자 밀기 시작했지요. 저는 하나에 미치면, 몰두하는 편이에요. 해가 지면 일을 할 수 없으니까, 해를 작대기로 받쳐 놓고 일하고 싶을 만큼 성실히 일했어요. 벽돌을 직접 쌓고, 콘크리트도 직접 치고, 어느 날 관절이 부어서 움직이지 않기도 했지요. 아내는 형님 그로서리에서 캐셔로 일하고, 아이들도 학교에 갔다 오면 물건을 포장했습니다. 처음 미국에 와서는 부부가 함께 청소를 한 적도 있어요. 청소하면서 ‘내가 얼마 전만 해도 더 큰 빌딩의 사장이었는데..’ 하는 생각이 밀려오기도 했지요.”
그는 그렇게 10여 채의 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2001년 몽고메리에 현대차 공장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듣고 앨라배마로 이주했다. 울산에서 그가 성장할 수 있던 배경은 현대자동차 건설이었다. 그의 첫 직장이 1975년부터 3년간 현대자동차였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공장 공사를 담당하게 된 그는 “만날 때보다 헤어질 때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금액이 크던 적던 의뢰를 받으면 이익보다는 품질을 먼저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잘 맞춰야 합니다. 그것이 회사가 롱런하는 비결입니다. 직원들에게도 ‘공사 못했다는 소리는 절대 들으면 안 된다’고 늘 말합니다. 또한 배경보다는 기술력이 중요합니다. 배경으로 수주 받으면 곧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만, 노하우가 있으면 시나브로 일이 쌓이지요.”
SYS-CON은 얼마 전, 800억원 규모의 공사를 수주했다. 또한, 건물 관리, 유지 보수에 관한 장기 계약을 종업원 250명과 함께 돕고 있다. 운도 따랐지만, 무엇보다 가족 같은 분위기의 운영과 이익보다는 품질을 우선으로 한 경영과 성실함의 결과였다. 심 회장은 ‘건축 및 재개발의 달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건설업계의 성공한 사업가가 됐다.
건설의 달인, 환원의 달인
하지만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어 늘 현장에서 살던 습관이 무리였던 것일까. 그는 2년 전 임파선 암으로 MD 앤더슨에서 치료를 받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누워 있으면 괜찮고 앉아 있으면 어지러웠어요. 얼굴이 너무 하얗다며 직원이 병원 예약을 했는데, 그 병원에서 앰뷸런스를 타고 더 큰 병원으로 저를 옮겼지요. 수혈을 세 팩이나 받고 정신이 돌아왔어요. 그 후 암 판정을 받았지요. 저항력이 없는데 무리하니까 헤모글로빈 수치가 떨어져 암이 퍼진 것이라고 하더군요. 항암치료로 145파운드이던 몸무게가 100파운드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는 “20년간 사업을 키우는데 올인하며, 일에만 묻혀 살았던 나를 돌아보며, 남은 인생을 덤이라고 생각하며 가족을 돌아보고, 욕심 부리지 말고 편안한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또한, 다시 성공할 수 있었던 발판이 되어준 한인 사회에 어떻게 돌려줘야 할 지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심 회장은 몽고메리 한인회를 2010~11년 섬겼다. 그리고 20년간 28개 테넌트가 입점한 그의 건물 중 3천4백 스퀘어피트 공간을 한인회에 기증했다. 몽고메리 한인회는 이중 일부를 한의사, 학원, 렌트카 회사에 렌트하여 연 4만 불 수입을 확보하며 자립형 구조를 갖추게 됐다. 풀타임 사무장도 생겨 업무 협조도 빨라졌다.
현재 앨라배마 한인회연합회를 섬기고 있는 그는 올 연말 장학재단을 만들 계획이다. 각 한인회 별로 추천된 학생들에게 1천불씩 기증해 한인회장들의 체면도 서게 해주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로만 보았던 나이아가라 폭포도 가보고 싶다.
“저는 십원 한 장 없다 해도 내 가족을 먹여 살릴 자신은 있었습니다. 아내도 ‘내 남편은 사막에 우리를 데려다 놓아도 부양할 사람’이라고 저를 믿어주었습니다. 기댈 곳이 있으면 의지하게 되고, 실수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내가 우물을 파서 물을 마셔야지, 돈, 친구, 가족에 기대서는 안됩니다. 또한, 신용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한국에서 사업해본 경험을 비추어보면, 저 또한 매일 술 먹고 골프 쳐주는 접대문화가 괴로웠던 것 같습니다. 인맥, 뇌물, 공정하지 못한 방법이 비즈니스에 개입되는 한국보다는 미국이 노력에 대한 대가가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민자들이 기반을 닦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성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열심히 해도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계단을 한 계단씩 올라가야 하는데, 세 계단씩 올라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1년을 앞당기려 하다가는 10년이 늦어집니다. 품질이 좋으면 안 한다고 해도 일해달라고 할 테니 정직하게 실력을 쌓으십시오.”
십일조의 비밀을 알았던 최고의 부자 록펠러는 “인생 전반 55년은 일에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 43년은 나눔을 통해 행복하게 살았다”고 회고했다. 청년기의 실패에 물러서지 않고 용기를 복돋아 전진했던 심 회장의 인생에 후반기 행복 또한 가득하기를 기도해본다.
대담 정리 강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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