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진박사의 선교 이야기] 기독교의 돌밭, 아시아
- 작성자 : HesedKosin
- 21-08-10 19:34
<기독교의 돌밭, 아시아>
선지자 말라기는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1:11)고 하였는데 아직 동남아에서는 하나님의 이름보다 왕의 이름이 더 두드러지고 절대왕권을 몰아낸 국가들은 군부 권력이 하나님 위에 군림한다.
OMF 선교사 Alex Smith 는 19세기 초기 개척자 선교사들은 많은 고생과 시련, 희생으로 수고하였으나 열매는 극히 적었다고 설명한다. 개신교 200년의 선교역사에서 기독교는 라토랫이 지적한대로 애니미즘(샤머니즘)의 소수부족 사회에서 교회성장이 일어나고 지금도 이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북부 베트남 개신교의 80%가 몽족인것이 대표적 사례다. 그들은 선교사에게서 복음을 들은것이 아니라 극동방송을 듣고 80년대 산에서 집단개종이 일어났다. 2년 전 Hanoi Bible College에서 강의한 적이 있는데 30명 학생 중 80%가 산에서 내려온 불쌍한 몽족이였다.
통역자는 서울 트리니티 신학대학원에서 영어로 3년간 공부한 베트남 주종족 출신여자였다. 그녀는 북베트남 복음교회에 너무 귀한 인재이다. 베트남 주 종족에게 복음화가 일어나면 종말인지도 모른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일에 이방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온다고 예언하였다 (사2:2). 아시아 선교역사에서 씨뿌리는 자들과 씨는 좋았다. 그러나 가시와 돌이 많은 밭이었다. “아시아는 한국을 제외하고는 기독교의 돌밭이다” (Asia is a stony ground for Christianity, except Korea). 이 말은 2014년 영국 The Economist (13 August 2014)가 한국을 소개하면서 한 말이다. 아시아를 선교적 관점에서 아주 예리하게 분석하였다.
1920년대 영국 성공회 선교사들은 불교 선교전략 세미나에서 물질세계를 악하게 보는 이원론적 불교세계관이 물질 긍정의 기독교 세계관과의 대립이 선교를 어렵게 한다고 하면서 소수 종족선교 우선을 권장하였다.
불교도대상 전도가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한 선교사가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설교하자 “예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끔찍한 죽임을 당하였느냐”고 반문하였다고 한다. 불교의 카르마(행위) 교리 (karma: 산스크리트, 엄밀히 말하면 전생에서 한 행위)는 전생의 행위에 따라 현재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믿는다.
어느 선교사는 불교가 샤머니즘과 많이 결합한 중국과 한국에서는 전도가 잘 되는데 동남아 불교는 혼합이 적어 어렵다고 하였다. 동남아 불교도 폴 히버트가 말한 대로 샤머니즘과 혼합된 folk religion에 불과하다.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그럴듯한 명분이 많다. 기독교가 서양종교라면 공산주의도 진화론 이론도 다 서양것이다. 그런데 모든 고등학교는 진화론을 가르치며, 많은 지식인은 기독교보다 한번도 성공한 역사가 없는 공산주의를 더 선호한다. 서구화 물결이 판치는 아시아에서 서양종교 운운은 핑계에 불과하다. 아시아 선교의 가장 큰 장애와 도전은 종교와 정치와 대중들이다.
1. 이데올로기화한 종교
아시아에서 종교와 정치가 동맹(unholy alliance)을 맺어 종교를 이데올로기화하고 말았다. 이데올로기는 모든 국민이 같은 이념과 종교로 함께 가자고 강요한다. 불교는 교리상으로 개인주의 종교이다. 그런데 동남아에서는 불교가 종교적 집단주의를 형성하여 불교에서 이탈은 곧 국가와 공동체의 이탈로 간주한다.
젊은 세대들은 세속화되어 종교에 큰 관심이 없다고 보는데 고등학교때 까지 불교 강의를 들어야 하고 공립학교 조회는 불교의식이어서 신자 학생들은 갈등을 느낄 수밖에 없다.
1920년대 동남아에 등장하기 시작한 불교 원리주의는 불교를 더 이데올로기화하여 불교 국가를 지향하고 다른 종교를 배격한다. 아시아의 종교 문화는 구시대로 돌아가고 있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나라는 각각 섬기는 신들이 있었다. “만민이 각각 자기 신의 이름을 의지하여 행한다”(미4:5)라는 말씀은 이것을 입증한다. 여호수아는 만년에 배신 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택하든지 “강 저쪽의 신들을 섬기든지 아모리 족속의 신이든지 택하라”라고 하였다(수24:15). 모든 민족은 자기 신이 있다는 것을 잘 설명한다.
2. 영적 노예를 자처하는 대중들
대중들도 스스로 영적 노예에서 해방을 원하지 않는다. 무슬림 여성들의 차도르가 답답해 보이는데 사우디에서 지식인 여성들이 자동차 운전을 허용해 달라고 데모한 적이 있지만 차도르에서 해방을 외쳤다는 소리 못 들었다.
바울은 이방 종교와 철학의 지배를 받는 것을 영적 노예로 표현하였다. “우리도 어렸을 때 초등학문 아래 있어 종노릇하였더니” (갈 4 : 3),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에게 종노릇 하였더니”(갈4:8). 백성들이 스스로 우상 문화에서 해방하려는 의지가 없이 더 고수한다.
승려가 백화점에 가서 여자용 고급신발과 옷을 쇼핑하면 대학생들은 승려를 비난하지 불교를 비난하지 않는다. 물론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한 대학생이 예수를 믿어 교회 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예배 중인 교회당에 들어와 고함을 지르기를 “왜 내 자식을 가족에게서 분리하느냐고” 소리치면서 다 큰 아들을 끌고 나갔다. 부모가 종교와 결혼을 결정할 정도이다.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는 미얀마인들의 그림 단추다. 그러나 국제인권단체는 노벨상 반납하라고 아우성이다. 국제인권단체는 아시아의 종교적 생리를 이해 못 하는 것 같다. 만약 수치가 로힝야 무슬림인권 탄압을 비판하고 그들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면 그녀의 정치 생명은 끝장나고 말 것이다.
기술 문명의 첨단인 스마트폰 세대가 영적으로는 후진국 수준이다. 왜 다신론적, 다귀론적 “우상 문화”가 아시아를 지배하는가? 그 답은 이스라엘에서 해답이 나온다. 구스타프 바르넥에 의하면 샘족 이스라엘은 원래 다신론적 우상을 섬겼다 (창11:31). 본문의 우르는 아카디아, 바빌론, 앗수르 문명의 본산지이다.
아시아 문명의 발상지는 불행하게도 우상 문화의 본산지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많은 은혜와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을 섬기려는 민족적 충동(Volksinstinkt)이 발동, 이방이 섬기는 우상들을 섬겼다고 말한다. 가나안 족들의 주신 바알은 풍요, 다산, 공동체 번영을 준다고 믿는다.
성경에 언급된 우상들은 고등종교의 높은 교리가 없다. 다만 인간의 가장 필요한 욕구(felt needs)를 충족시켜주는 신이다. 인간들은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든다”(출20:4).
성경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먼저 구하면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라고 하였다. 부자가 되는 위대한 경제이론이다.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도 거절하면 그들의 책임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지 못한 자들이 많다면 선교지 교회와 선교사의 책임이다.
(2021. 0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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